**2차대전사(1)-프랑스 전투2-
페이지 정보
본문
-프랑스의 수모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전광석화와 같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조공을 담당한 B집단군은 A집단군을 측방에서 엄호하고 연합군
상륙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먼저 로테르담과 헤이그에 공수부대
를 투하하고 공중폭격을 가했다. 독일 B집단군은 연합군 좌익을
벨기에 영토 깊숙이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5월 17일 B집단군 소
속 기갑부대는 A집단군의 진격을 증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한편 A집단군은 5월 10일고 11일 선두의 기계화부대가 아르덴 지
역을 통과했다.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기계화군은 제 1및 제 2선
에 기갑사단, 제 3선에 차량화부대를 배치하고 진격했다. 클라이
스트군 우측은 또 하나의 기갑군단이 가세했다. 벨기에 국경과 아
르덴 지역 삼림통로는 주위에 지뢰와 장애물이 많았지만 경비하는
부대가 없어 독일 기갑부대들은 순조롭게 진격했다.
5월 12일 저녁, 독일 기갑부대는 속속 뫼즈 강에 도달했다. 구데리
안의 기갑군단은 뫼즈 강 동쪽 스당, 롬멜의 제 7기갑사단은 드냉
을 각각 점령했다. 라인하르트의 기갑군단도 14일 저녁 몽테르므와
메지에르에 도달했다.
독일군은 프랑스군이 당황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도하작전
에 들어갔다. 모든 교량은 거의 파괴되었기 때문에 부교를 가설해야
했다. 롬멜, 구데리안 등 지휘관들은 급강하 폭격기와 전차 및 자주포
지원을 받아가며 부교 가설작업을 직접 지휘했다. 도하작전을 신속
하게 실시한 결과 15일 아침까지는 모든 기갑부대의 도하가 완료되었
다. 이는 본래 계획을 약 3~4일 앞당긴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뫼즈 강을 도하한 뒤 진격하는 독일군 앞에 프랑스군은 힘없이 무너
졌다. 프랑스 제9군은 새로운 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롬멜 기갑사단
에게 돌파되었다. 제9군 사령관 지로는 부임한 지 수일만에 독일군에
게 생포되는 불운이 겹치고 그의 부대는 대부분 철수 아닌 패주의 오
합지졸로 변했다. 또한 뫼즈 강 가까이에 주둔한 프랑스 군 3개 기갑
사단은 제대로 전투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제1기갑사단은 플라비옹에
서 연료 부족으로, 제2기갑사단은 히르송 역에서 하차 과정중에, 제3
기갑사단은 스당 남쪽에 고정배치되어 있다가 기습공격을 받고 각각
궤멸되었다.
히틀러를 위시한 독일군 수뇌부는 기갑부대의 지나치게 빠른 속도
와 과도한 전투정면 확장에 오히려 우려했다. 그들은 프랑스군의
반격을 두려워했다. 사실상 당시 상황은 만일 프랑스군이 남쪽에서
부터 대반격을 실시했다면 독일 기갑부대를 고립시킬 수 있었다.
독일 기갑부대들은 영국해협연안에 속속 도착했다. 19일 선두 부대가
생 캉탱에 도달했을 때 육군사령부 진격제한조치는 풀렸다. 20일 아브
빌을 함락, 독일군은 단 10일만에 240마일 진격함으로써 영원정군 병
참선을 차단하고 프랑스군을 남북으로 두동강내었다. 한편 19일 저녁
가믈랭 후임으로 임명된 프랑스 군사령관 웨이강 장군은 독일군 기갑
부대와 보병부대의 분리를 노리며 솜강 남북 양쪽으로부터 대규모 반
격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그는 상황을 파악하는데 시간을 너무 쓴
결과 호기를 놓쳤으며, 통신상태 불량, 상호 협조 부족 등의 문제 때문
에 반격다운 반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설상가상, 영원정군 사령관 고트 장군은 연락도 없이 독단적으로 그
의 부대를 해안으로 철수하도록 조치했다. 웨이강이 시도한 반격은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자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그 책임을 서로 전가
하기에 급급했다.
해안까지 진출한 독일군이 칼레와 오스텐데를 점령하고 그 사이에 있
는 됭케르크만을 남겨 놓게 되었다. 솜 강 북방에서 철수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그곳에 고립,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했다. 영국정부는
영국군의 전멸을 모면하기 위해서 고트 장군에게 본국철수를 지시했
다. 철수부대들은 속속 됭케르크로 몰려들었지만 별다른 엄호물이나
은폐시설이 없는 좁은 해안지대에서 3면 압박을 받았다. 해상 철수의
성공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5월 24일 뜻밖에도 히틀러는 진격정지명령을 내렸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의도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독일군의 진격속도가 너무 빠른데
대해 우려해 왔던 그는 돌다리도 두들겨보며 건너자는 생각을 갖고
기갑부대의 진격을 정지시켰던 것이다. 또한 연합군의 해상철수는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택지가 많은 지역에 기갑부대를 투입하는 일 대신에 공군을 활용
해 마무리 작전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덩케르크에서 철수하는 연합군
덕분에 시간을 번 영국군은 구사일생했다. 그들은 됭케르크 방어를
재편성하고 각종 선박을 동원해 육, 해, 공군이 사력을 다하는 노력
끝에 6월 4일까지 대철수작전을 실시, 30만이 넘는 대군을 영국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철수에 성공하자 영국군은 개선이라도 한 듯 소란을 피웠으나, 그것은
비참한 패배 후 벌어진 패잔병의 탈출에 불과한 것이었다. 철수 병력
은 몸만 빠져나갔지 모든 중장비와 보급품을 대륙에 방치한 채였으니,
그 물적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 됭케르크
를 함락시킬 때까지 불과 3주만에 1백만 명 이상의 포로를 생포하는 역
사상 보기 드문 대승을 거두었다.
프랑스군의 병력손실은 30개 사단에 달했다. 이는 총병력의 1/3에 해당
하는 병력이었다. 나머지 64개 사단이 아브빌로부터 마지노 선에 이르
는 방대한 정면을 방어해야 했으나, 독일군의 2단계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부터 그들은 절망상태에서 싸웠다.
결국 6월 14일 파리가 함락되고 16일 레이노 수상이 물러났다. 신임 수
상 페탱은 22일 무조건 항복했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
이었다.
~2차대전사(2)영국전투로 이어집니다...
2001년 11월09일 2차대전사 운영자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totalmilitary.ne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