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 카시노의 '푸른 악마'-이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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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슐름야거의 탄생은, 모든 일반적인 베르사유의 조약에 의한 군비확장의 걸림돌에 똑같이 적용 받았다. 공군에 관한 적용이 문제였는데, 독일은 이 낙하산으로 뛰어내리는 것은 공군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애초부터 있었다. 최초로 점프한 팔슐름야거의 연습강하도 항공을 군사로 못쓰게 규정한 덕택에 스포츠 비행기였다. 그래서 초기에 팔슐름야거를 본따 만들었던 독일육군의 강하 엽병들도 결국은 공군 팔슐름야거의 일개 대대로 편입되어 버린다.(공군도 비행기가 없는데 육군이야 말해서) 조약에 찌든 독일은 먼저 민간단체인 항공에 관한 협회들을 만들고 노우하우를 쌓았다. 이것이 루프트와페의 원조가 된다.
사실 대규모의 낙하산부대의 개념은 소련에서 시작되었다. 소련은 1932년 최초로 낙하산 여단을 만들었고, 1934년 모스크바의 공군 기념행사에서 모습을 비추었으며, 1935년 키에프 근처에서 연대급 6천명을 강하시키는 세계에서 보기드믄 낙하산부대의 개념을 만들었다. 분명히 독일도 소련의 공수부대에 강한 자극을 받았다. 자극이라기보다는 아이디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런지 모른다. 독일은 1936년 1월에 팔슐름야거를 제대로 정식 편성하고 점프스쿨을 열었다. 비행기는 주로 JU-52 였고 고도는 120메터 정도였다.(최초에는 예비 낙하산이 없었다. 삼빡합니다. 저도 한번 해보고 싶군요.역시 스포츠는 목숨걸고 하는게 진짜라고 생각되는 군요.) 1937년 5월에는 처음으로 글라이더 트레이닝이 실시됐다. 자원한 조종사출신의 병력들이 초기모델인 DFS-230 경량 공격 글라이더로 시험 활공을 했다.(물론 글라이더 전술도 소련이 먼저 나왔다)
그리하야, 이런 저런 사정 끝에 1938년 7월 1일 사단급의 팔슐름야거가 등장한다. 사단장은 Generalmajor Kurt Student 인데, 이 사람은 바로 아래 천마님이 올려주시는 아른헴의 전투에도 등장하는 스투단트(학생부군신위)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은 팔슐름야거의 크레타 섬 침공때, 완전한 사령관은 아니었지만, 작전계획을 짜고 주요작전을 지휘했다. 그가 크레타에서 했던 것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운송수단의 계획과 징발이었다. 아시다시피 팔슐름야거 뿐만 아니라, 일반 독일 보병도 심지어는 요트를 타고 크레타 섬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왜? 독일군의 운송수단이 모자라서였다.(그리고 크레타에서의 독일군 수송기 대량 격추는 차후 소련전선의 보급에 큰 영향의 조건이 된다.)
팔슐름야거의 초기 작전은 노르웨이 오슬로 부근의 Fornebu 비행장 점거. 에방에밀 글라이더 공격(실제는 4개 루트의 동시 작전중 하나가 에방에밀이었음). 네덜란드 침공시 비행장 점거와 수도 공격. 그리이스 코린트 운하 전투. 공수병들의 무덤-크레타 섬 침공. 아프리카 튜니지아 전투. 이탈리아 Gran asso에서의 뭇솔리니 구출. 1943년 엘바 섬 전투. 이탈리아 Monte Rotondo 전투. Dodecanese섬 정복(대-영국군). 아르덴 점프 돌격. 시실리 방어 작전. 그리고 이 몬테 카시노 작전으로 이어진다.
(*요즘 보이는 미군 레인저의 침공작전시 비행장 점거 주특기는 이미 2차 대전때 독일군이 선례를 보였다.)
전에 어떤분이 언급하신대로, 그나마 이때까지는 팔슐름야거의 병력과 전투력이 아직 하강하기 전이었다. 천마님이 올리시는 멀고 먼 다리에서, 주로 미 82사단에서 101사단-그리고 영국군 30군단의 전면까지, 전차와 포병으로 결합된 팔슐름야거의 병력들이 싸웠으나, 이때는 이미 전의 명성과는 달리 많이 쇠락한 상태로, 심지어 나이메헨 전투 부근의 강하엽병들의 부대에는 독일서 억지로 빼온 청소년기의 징집병 등도 있어서, 전투 직전까지 훈련을 받고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전투 중에도 기동훈련을 한 기록이 있음)
어쨌거나 그 유명한 몬테 카시노로 포커 한판 때리러 갈까요?(딜러는 편의상 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내년 패를 학?실히 행운으로 밀어드립니다)
아래 내용은 자살 직전의 한 초등번역자가 번역한 것이므로, 첨언이나 수정의 리플이 달려도, 아무런 적개심이 일지 않음을 알려 드립니다. 일부는 참고하시고 독일군 편성에 지식이 많으신 분들은 특히 달아 주십시요.(그리고 내용이 길어서 좀 줄입니다)
<몬테 카시노 전투와 독일군 방어선 구스타브 라인. 1944년.>
"Whoever is master of the hill is master of the valley(의역: 어떤 놈도 영원히 여기를 차지못할 것이다."
<전주곡>
전선은 밀리고 연합군은 이탈리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영국 8군은 9월 3일에 레지오, 9일에 타란토에 상륙했다. 이 상륙에서 독일군은 변변한 대항도 못했다. 1943년 9월 9일에 미 제5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이탈리아는 휴전을 제의했다. 이것은 독일군 지휘관 Field Marshall Kesselring이 예언했던 것이기도 하다. 독일군 16기갑사단은 이 부대와 맞섰다. 독일군 10군은 이 기갑사단의 배후에 숨어서 부대를 규합하고 있었다.
(참고: 이탈리아 전선의 전은 아프리카라고 볼수가 있죠. 이탈리아는 '선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한니발을 아프리카 사막에서 조졌다'라고 생각하고 이탈리아군 아프리카로 전진-고착-히틀러 지원(물론 연료쟁취문제 있음)-연합군 결전준비-결국 연합군 이김-바다 건너 시실리 공격함-연합군 이김-독일군 이탈리아로 튐-쫓아감(너 일롸)-연합군 안지오 공격---이제....짠)
<구스타브 라인>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독일 10군은 연합군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탈리아 중부로 후퇴하여 차기전투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산그로 강의 입구에서, 그리고 라피도 강과 그리즐리아노 강의 서쪽 입구에 있는 부즈루지 산악에서, 독일군은 구스타브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곳에 카시노라는 마을이 있었다.(명칭은 town이고 마을보다는 실제로 시에 가깝다. 중간 정도?) 그 마을의 1킬로미터가 안 되는 저지대에 천 7백 피트 높이의 몬테 카시노라는 고원지대가 있었다. 거기에 1세기 전에 지어진 베네딕트 수도원이 있었다.
(모든 지형은 수도원이 있는 언덕을 둘러쌓고 그 둘러싼 지형들의 각 언덕들에 독일군 팔슐름야거가 포진함.즉, 연합군을 가로막은 것은 몬테 카시노 수도원 단 하나가 아니라, 수도원을 둘러싼 인근의 골치 아픈 치형이었다. 4개 정도의 확연한 고지들이 주변에 있었다.)
몬테 카시노는 구스타브 라인의 중심축이 되고 말았다. 그곳은 로마로부터 100마일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위치는 북쪽으로 루트 6인 로마로 통하는 국도와 연결이 되어 있었고, 릴리(읽기가 완전치 않음)계곡을 통해서 주변을 감싸안는 모양이었다. 수도원을 통해서 마을과 인근이 완전히 관찰가능한 위치였다. 몬테 카시노는 주변의 봉우리와 언덕들이 싸고 있었다. 연합군이 점령한 192고지를 완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였고, 435고지인 Hangman's Hill(교수대의 언덕)은 또 다른 몬테 카시노의 주변봉이었다. 북서쪽 1킬로미터 지점에는 593고지가 있었다.(Calvary Hill:고난의 언덕) 그 북쪽에는 445고지가 Snakeshead Hill(뱀머리 언덕)라는 명칭으로 있었다. 이 모든 고지들은 이 전투로 인해서 피로 물들었다. 미군은 영공의 공군력을 장악한 상태였고, 바다에는 연합군의 군함들이 자리를 잡고, 해상을 통한 보급지원은 연합군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독일군은 이미 구스타브 라인으로 후퇴해서 재정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연합군은 9월 16일 살레르모의 남동쪽으로 이동 명령을 받았다. (교수대의 언덕과 고난의 언덕은 그 이름에 걸맞는 전투가 벌어진다)
그리즐리아노 강변을 따라서 폭격을 가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카시노 마을은 이미 폭격을 9월 10일 받았다. 당시 독일군 뿐만 아니라 일반 이탈리아 시민들도 많은 사상자가 났다. 당시 수도원은 폭격의 대피장소로 쓰였다. 폭격후에 독일군 제 15기갑군단은 서쪽으로부터 후퇴하여 수도원에 도달했다. 독일군은 즉각 몬테 카시노의 주변에 참호를 파고 요새화 했다. 그리고 마을을 방어거점으로 만들었다. 마을의 주변 접근로는 지뢰가 설치됐다. 독일군은 연합군을 조용히 기다렸다. 15기갑군단의 탱크들은 이미 괴멸되었고, 거의 보병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명령에 의해 독일군 1낙하산 사단이 그곳에 합류해있었다.(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낙하산을 타는 부대는 경무장 신속대응군이다. 즉, 출동기동이 빠르다.)
연합군은 그곳을 통과하여 이탈리아 중부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미 5군은 서쪽에서, 영국군 8군은 동쪽에서 진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쪽 방향에서 Foggia를 점령했다. 시점은 9월 27일로, 그곳에 중요한 비행장이 있었었다. 9월 11일에는 코르시카 섬이 프랑스군에 의해서 탈환됐다.(이후 아직까지도 군사기지로 쓰고 있음) 그러나 겨울의 혹한기를 이유로 영국군 5군의 사령관인 알렉산더 장군은 11월 15일 그 진출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구스타브 라인을 중심으로 독일군의 방어선이 견고해지자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영국군은 진격을 시작했다. 영국 8군은 동쪽에서 LI Gebirgs 군단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거기다가 사나운 날씨로 인해서 멈칫하였다. 서쪽의 미 5군은 독일군 XIV 기갑 군단의 기갑사단과 부딪쳤다. 그리고 연합군은 이 구스타브 라인이 쉽게 뚫리지 않을 것을 예감했고, 갑자기 수가 막혔다. (연합군은 안지오 공격이 기습적인 침공이 되리라고 믿었지만, 출발부두의 민간인들도 '안지오'에 간다지요? 하고 물을 정도였다. 과거영화에 보면 부두의 상인이 미군에게 여성 속옷을 팔면서 '안지오의 여자들은 이거면 깜빡 넘어간다니까'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죠.)
카시노 앞에는 7개 나라의 연방사단이 있었다.(아주 중요한 사실) 인도군. 뉴질랜드군. 남아프리카군(기갑사단). 브라질군. 그리고 5개의 미국사단과 5개의 영국군 사단. 프랑스 3개 사단. 폴란드 3개 사단이 있었다. 그리고 영국군에는 그 유명한 구르카 용병연대가 있었다.
연합군은 수도원에서 고착되고 있었다. 그들은 거꾸로 수도원 인근에 고립된 부대였다. 독일군은 수도원말고도 인근의 폭격된 바위틈에 위장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아주 계획적으로 포격을 퍼부었다. 그 포격으로 독일군의 통신망은 파괴된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독일군의 지휘체계는 살아 있었다. 전초 기지에는 독일군의 71박격포 연대가 독일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특히나 비가 퍼붓고 있었던 관계로 독일군 박격포들은 철저히 숨겨지고 있었다. 수도원의 바로 밑에는 동굴이 있었는데 독일군은 거기에 탄약을 비축하고 있었다. 원래 이곳은 괴링의 기갑사단이 주둔했던 곳으로 회계 등의 지원부대와 미술품에 대한 모종의 작업을 하던 곳이었다.(히틀러의 삥땅 수집소? 영화 레이더스에서 해리슨 포드가 잘못하면 여기로 끌려 갔을 수도...) 그들은 북쪽의 이탈리아 점령권으로 퇴각을 하면서 일부를 폭파시켰었다.
<첫 전투>
구스타브 라인에 대한 첫 공격은 1944년 1월 17일의 연합군의 안지오 공격과 동시였다. 영국군 10군단은 카시노 서쪽에 있는 가리즐리아노 강을 건너서 릴리 계곡의 독일군 거점을 공격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원정군은 산악의 동쪽으로 진출해 있었다. 미군 2군단 역시 카시노 남쪽의 수마일 지점에 있는 라피도 강을 건너서 릴리 계곡으로 향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이 진출로 제한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곧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고, 결국 몬테 카시노 뒤쪽의 산악에 참호를 파고 전투를 준비했다. 미군 36사단은 2일 동안 공격을 준비했다. 라피도 강을 건너기 위한 보트도 이미 준비해놓고 있었다. 20일, 공격은 개시됐다. 그러나 라피도 강의 도하는 만만치가 않았다. 도하도중 상당수의 병력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나중에 이 몬테 카시노 전사자 현황을 보면 그 규모를 알수 있음. 전사자는 백단위가 아니라 천단위임)
연합군 포병은 맞은 편의 제방에 있는 독일군 진지에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보트들이 맞은편 제방에 도찰하자 연합군의 포격은 어쩔수 없이 멈췄고, 바로 이어서 독일군의 살인적인 사격이 시작되었다. 36사단의 일부 병력은 강의 다른 편에 도착하여 독일군 거점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밤동안 공병들이 가교를 만들어서 넘어간 연합군의 증강을 지원하려고 애썼다. 가만히놔두면 독일군에게 전멸할 것 처럼 보였다. 그 만큼 독일군은 강력히 방어했다. 그러나 날이 새자 몬테 카시노에서 날아온 포격으로 공병교는 끊어지고 말았다. 몬테 카시노의 위치는 아주 인근에 유효한 포인트였다. 넘어간 미군들은 포위가 되고 말았다. 다시 밤 동안에 교두보를 마련하려고 했으나 진전이 시원치 않았고, 결국 미군 36사단은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다.
다시 1월 24일, 미군 34사단이 라피도 강의 다른 편, 몬테 카시노 동쪽으로 도하하여 독일군의 거점에 도달하려고 했다. 결국 미군은 전진에 성공하여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 언덕 100야드 전방까지 진출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진출이었고, 미군은 곧바로 참호 구축에 들어갔다. 구스타브 라인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은 사실상 상당히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미군의 정령지대는 아주 작은 편이었다. 미군이 즉각 그 라인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안지오>(이 지방은 여성의 순결이 많이 지켜질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1월 22일, 미 6군단의 미군과 영국군은 카시노로부터 60마일 북쪽인 안지오의 해변에 성공적으로 상륙했다. 결국 미군은 이 카시노의 거점이 아주 걸끄러운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구스타브 라인은 견고했다. 그곳을 통과해야만 로마로 갈 수가 있었다. 로마가 그리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유서로 인해 점령할 경우 심리적 파장은 클것으로 기대했다. 거기다가 독일군 14군의 일부가 안지오로 공격해왔다.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은 독일군을 끊어놓는데 실패했다. 독일군 14군의 병력은 연합군을 안지오로부터 못나오도록 압박을 받고 있었다. 고착된 것이다. 연합군은 안지오의 해안지대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두번째 전투>
카시노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은 1월 15일 계획됐다. 1월 14일 수도원의 인근에 연합군은 항복을 권고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이것은 전면적인 공중폭격을 가하겠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탈출해서 투항하는 사람은 폭격을 피할 수 있다고 적힌 전단이었다. 그러자 독일군은 경사면에 있던 독일군을 분산시켰다. 전단에 독일군이 별 반응이 없자 폭격은 15일에 시작됐다. 이것은 영국 본토로부터 날아오는 연합군 항공기의 첫 번째 이탈리아 공중폭격이었다. 수도원은 엄청나게 파괴됐고 거의 폐허가 되었다. 독일군의 혼란이 목격되었다.
미군은 숲을 통하여 수도원으로 진격할 차비를 가췄다. 당시 수도원의 벽은 15피트 두께였는데, 폭격으로 인하여 일부 돌격가능한 포인트가 생긴 것이다. 폭격이 끝나자 바로 보병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뉴질랜드 2사단의 병력이 카시노 남쪽의 마을을 공격하면서 철도역을 목표로 하였다. 그곳은 마을 방어의 중요한 구심점중에 하나였다. 수도원을 둘러싼 언덕은 독일군 90기갑척탄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 사단은 독일군 14군의 예비사단이었다. 카시노 남쪽의 전방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 90기갑척탄사단은 Kampfgruppe Schulz의 명령으로 독일 팔슐름야거 1낙하산 사단의 1연대의 기관총대대와 3연대의 3대대가 증강으로 투입되었다.
그들은 수도원의 북서쪽에 거점을 잡았다. 그 언덕은 바로 1낙하산사단 기관총대대 그 자체였다. 마을을 공격중인 뉴질랜드 부대는 독일군의 탱크와 포병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그들은 결국 라피도 강은 다시 건너서 후퇴했다. 엄청난 사상자가 났다. 미군 34사단과 36사단은 이른바 뱀의 언덕이라고 불리우는 곳을 폭격 몇일 전에 진출했었다. 그곳은 수도원을 감제 관측하기에는 적격이었다. 바로 수도원의 1킬로미터 후방이었다. 그리고 미군 4인디언사단이 이른바 '고난의 언덕(Calvary Hill)에 접근하여 위험을 경감시켰다. 폭격이 시작되자 인디언 사단의 병력들은 고난의 언덕에 참호를 팠는데, 연합군의 공중 오폭으로 많은 사상자가 또한 발생했다. 그들은 고난의 언덕에 공격을 시도했으나, 그 전면에는 팔슐름야거 3연대 3대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국의 구르카 용병연대의 병력들이 수도원의 후면으로 전급하다가 강력한 반격 사격에 좌절됐다. 공격은 1월 19일 전면 중단됐다. 인디언 사단과 구르카 연대의 생존자들은 여전히 참호를 파고 몬테 카시노에 근접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들 중 몇은 독일군 참호와 몇 야드를 맞대고 있는 곳도 있었다.(이 전투에서 뉴질랜드군, 인디언 사단과 폴란드 사단과 구르카용병이 엄청 고생했다. 난 연합군이 너무 불쌍한 사람들 이용해 먹은 느낌이 든다.)
1월 20일, 독일군 1낙하산 사단의 병력들이 90기갑척탄사단의 일부 병력을 구조했다. 이때 독일군 15기갑척탄사단과 71보병사단이 카시노의 방어에 다시 증강됐다. 1월 26일 8킬로에 걸친 긴 섹터가 독일군 1낙하산사단에게 위임됐다. 팔슐름야거는 마을의 방어에도 보강되고 있었다. 이 임무는 1팔슐름야거 선구중대가 중위 Heinz Austermann의 지휘 아래 맡겨 졌다. 그들은 마을의 동굴을 이용한 거점과 건물들 사이로 진지를 구축하고 마을의 주변에 지뢰를 매설했다. 그들은 마을의 수산시장과 콘티넨탈 호텔을 중심으로 요새화하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뉴질랜드 병력은 트럭으로 증강되고 구축되는 독일군의 방어를 관찰할 수가 있었다. 포병도 증강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을에는 팔슐름야거 3연대 2대대가 있었다.
카시노에서의 팔슐름야거의 박격포.(3번째 전투)
5월 15일이 되자 폭격은 다시 시작됐다. 날씨는 맑았다. 그러나 폭격이 시작되면 팔슐름야거는 땅속으로 피했으나, 폭격이 끝나면 다시 나타나서 방어진지에 결연히 나타났다. 거기다가 나무도 별로 없는 수도원 저년으로 공격하는 것은 죽음처럼 보였다. 우회하자니 언덕들을 다 막고 있었다. 팔슐름야거의 3연대 본부는 수도원 언덕 밑의 동굴에 있었다. 그곳은 8-90명의 대원들이 폭격으로부터 숨을수 있는 크기였다. 팔슐름야거도 폭격으로 상당한 희생자가 났고, 그중에 1개 대대는 200여명이 전사하므로써 괴멸까지 갔다. 뉴질랜드 병력이 그 괴멸직전의 팔슐름야거 대대가 있는 곳으로 진출했으나,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듯이 가공할 반격을 펼쳐서 저지하였다.
접근했으나 포탄의 크레이터들로 인해서 전진을 못하고 움찔하고 말았다. 탱크보다는 오히여 포병이 더 효과적이었다. 탱크 조종수들은 크레이터에서 아래위로 들릴때 전차 하부 등 장갑이 약한 곳에 팬쩌 파우스트를 맞으면 그대로 작살이란 것을 알았다.
다시 구르카 연대가 Hangmans Hill(교수대 언덕)로 진격했으나 부분적으로 대열은 파괴되고 결국 그 자리에 참호를 구축했다. 영국군은 성곽 언덕에 일부에 진출했다. 몬테 카시노로 떨어지는 연합군 포탄은 너무도 엄청난 나머지 연기가 자욱하여 포병 관측반이 일시적으로 관측을 할수 없을 정도였다. 그 포병은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뉴질랜드 병사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뉴질랜드 군은 점차 마을을 점령하기 시작했으나, 아직도 일부의 고립된 거점은 독일군의 손아귀에 있었다. 특히 콘티넨탈 호텔은 독일군의 거점으로 남아 있었다. 뉴질랜드군은 집과 집 사이를 이동하면서 수일간 전투를 벌였다. 그러면서 점차 전진하기 시작했다. 팔슐름야거 3연대는 전진하는 뉴질랜드군에서 집중된 포격을 퍼부었다.
16일, 독일군은 마을의 남아있는 독일군 거점에 팔슐름야거 3연대 2대대 300명을 증파했다. 그러나 그 중 160명은 포격으로 전사, 부상, 실종됐다. 혹은 상당수가 폭격화염에 타 죽었다. 이제 마을의 방어 책임자는 Hauptmann Rudolf Rennecke이었다. 수도원은 다시 폭격과 포격이 가해졌지만, 그들은 지하의 벙커에 숨어서 큰 사상자를 내지 않았다. 교수대 언덕에 고립된 구르카 용병부대는 독일군의 저항이 강해 구출할 수가 없었다. 연합군은 구르카 부대에 공중으로 재보급품을 떨어트렸으나 일부는 수도원의 독일군 수중으로 들어갔다. 재보급품의 일부에는 환자에게 수혈할 피가 들어 있었는데, 독일군은 그것을 아주 유용하게 썼다(알게모르게 일어난 적십자 정신). 19일,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마을을 다른 방향에서 공격하고, 교수대 언덕에 있는 구르카군을 증강해서 수도원을 정면으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구르카군의 증강과 구출에는 인디언 사단의 병력이 맡았다. 연합군의 전차들이 북쪽에서 카시노로 공격을 돕기로 했다.
연합군은 다시 마을로 진격을 시도했지만, 독일군의 기세는 꺽이지않고 여전히 강력히 저항했다. 독일군은 폐허가 된 건물에 탱크를 숨겨 기습포격함으로써 연합군에게 많은 희생자를 선사했다. 인디언 사단과 구르카 부대를 이용한 수도원 정면 돌파는 연기됐다.
그런데 이번엔 난데없이 팔슐름야거 4연대의 1대대가 영국군과 인디언 사단이 점령하고 있는 고난의 언덕에 수직으로 돌격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그들은 수도원의 전면으로 반격-돌격한 것이다. 전투는 그야말로 백병전이었다. 서로간에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이 돌격은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독일군 병력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 놀랍고 상상할수 없는 반자이 돌격에 일종에 공포감을 느꼈다.(적어도 2차대전 중기까지도 전투후에 승과 패를 인정하고 항복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런 문화속에서는 포로도 존중해주는 것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전쟁의 경과는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
수도원의 뒤쪽으로 연합군의 탱크가 나타나자 독일군 팔슐름야거는 펜쩌 파우스트로 탱크들은 박살냈다.(Panzerfaust’s and Panzerschreck’s:설명 부탁. 장비가 두개로 나오는군요.) 이렇게 독일군의 펜쩌 파우스트공격으로 전열의 탱크들이 무력화되자, 탱크의 행열은 주춤했고, 이를 틈타 독일군들은 수류탄과 지뢰로 멈춰선 탱크들을 무아지경으로 만들었다. 반대로 독일군은 뚫려진 구멍으로 들어오려는 연합군에게 화염방사기를 동원했다. 알베네타 농장으로 진입하려던 독일군의 탱크 16대도 연합군의 바주카포 공격으로 5대가 파괴되면서 물러났다. 19일 정오쯤에 수도원에 대한 정면 공격은 좌절됐고, 진출했던 병력들은 다시 몬테 카시노 주변에 참호를 팠다. 그러나 뉴질랜드 군은 카시노 마을의 대다수 부분을 점령했고, 연합군은 이제 다음 목표를 Castle Hill로 삼았다. 그 곳은 마을을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독일 Heidrich장군은 약간 남은 카시노 마을의 독일군 방어점이 결국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일군은 마을의 연합군 거점에 가차없는 냉혹한 포격을 퍼부었다. 23일, 언합군은 전진을 중단했다. 15일 이후로 3천명 가량의 연합군이 손실을 입은 것이다. 25일, 연합군은 공중폭격과 포병의 포격으로 수도원 인근을 다시 폭격했다. 연합군은 교수대의 언덕에 있는 연합군에게 이 포격을 틈타서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그 교수대 언덕에서 연합군이 탈출하자, 다음날 독일군은 나찌의 휘장인 '만자 십자장'을 그 언덕에 보란 듯이 세웠다. (연합군이 보기에 얼마나 기괴러블 호러블 했을까?)
다음날 연합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5월이 가기전에 그곳을 돌파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드리아 해안에 있던 영국군 8군이 구스타브 라인을 향해 진격했고, 그곳은 카시노의 서쪽 방향이었다. 그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의 에니그마 보안통신기를 암적으로 탈취했다. 그것으로 인해서 연합군은 독일군의 범위와 병력 등의 정보를 얻었다. 그것을 토대로 연합군은 노르망디 침공 전에 받드시 그곳을 돌파해야한다고 결연히 결정했다. 즉, 연합군이 숫적으로 우세인 것을 안 것이다. 연합군은 모든 가용한 수단을 동원해서 그곳을 돌파하기로 맘먹었다. 그래야만 노르망디 침공시에 프랑스로 들어갈 병력을 보충할 수가 있었다. 지연없이 공격은 감행됐다. 공격은 네 개의 방향으로 계획됐다. 미 2군단은 서쪽해안의 루트 7로(국도를 뜻함) 정면돌파하고, 미 5군단은 안지오 해변에서 본토로 진격한다. 프랑스군 4개 사단은 몬테 카시노 뒤쪽의 릴리 계곡을 공격한다. 영국군 8군단은 라피도 강을 건너서 마을을 완전히 소탕하고 카시노의 서쪽 도로를 차단한다는 계획이었다.
폴란드군 2개 보병사단과 1개 기계화 사단으로 이루어진 폴란드 2군단은 몬테 카시노의 정면 공격을 맡았다. 폴란드 군의 목표는 수도원 그 자체였다. 대신 전과의 방법을 달리해 수도원을 포위한 뒤, 북쪽으로부터 공격하기로 맘먹었다. 바로 수도원 뒤쪽의 고난의 언덕(Calvary Hill)이 공격로였다. 그곳에는 팔슐름야거 3연대 3대대가 있었다. 독일군의 1낙하산 사단은 새로히 편성되고 약간의 보충을 받았다. 4연대는 수도원 인근의 마을 거점에 강력한 방어선을 맡았다. 3연대는 카시노의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1연대는 예비로 남겨 두었는데, 그들은 밤을 통해서 흔적없이 빠져나갔다.(전투가 중단된 모두가 곯아 떨어질 새벽에 유유히 빠져 나갔다)
<4번째 전투>
드디어 연합군의 2천문 가량의 포가 불을 뿜었고, 이 전에 없던 포격에 독일군은 당황했다. 그리고 한시간 뒤 폴란드군이 고난의 언덕으로 진출했다. 카시노의 북서쪽 1킬로미터 지점이었다. 그들은 몇일 전에 그 산에서 영국군 78사단을 구출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팔슐름야거의 혹독한 저항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었다. 폴란드 군은 그 고난의 언덕을 서너번 점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13일, 후퇴명령이 떨어져서 그곳을 나왔었다. 영국군 8군단은 4마일 가량 전진해 있었다. 프랑스군은 성공적으로 릴리계곡으로 들어가 독일군 방어부대와 전투를 시작했다. 안지오 해변에 있던 미 2군단도 바다에 떠있던 함정들의 포격을 지원받아 내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쯤 되자 독일군의 구스타브 라인은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일부가 돌파당하기 시작했고, 연합군들은 우회해서 돌아 들어오고 있었다. 16일의 폴란드군 공격에는 연합군 탱크들이 백업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고난의 언덕을 점령하면서 수도원의 독일군의 퇴각로마저 완전히 잘라버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포병과 박격포로 폴란드군의 공격에 응수했지만, 폴란드군은 고난의 언덕을 압도하고 있었다. 구스타브 라인으로 돌파하는 연합군의 배후에는 독일군이 모르는 캐나다 군이 예비대 및 백업포스로 있었다.
결국, Field Marshall Kesselring(commander Army Group C)로부터 카시노 시를 버리고 후퇴하라는 명령이 드디어 떨어졌다. 수도원과 산악도 모두 버리고 퇴각하라고 명령이 내려왔다. 잘못하다가는 모두 포위되어 몰살될 위험을 느꼈다. 병력의 숫자대비는 독일군은 아주 열악했다. 그리고 연합군의 화력은 문 수에 있어서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했다. 이때, 연합군은 로마의 서쪽으로 통하는 6번 도로의 차단을 실수로 놓치고 말았다. 이길을 통하여 카시노에 있던 약 천명정도의 독일군이 북쪽으로 탈출했다. 이 들의 대부분은 17일 밤 몬테 카시노를 마지막으로 빠져 나온 독일군 팔슐름야거 공수 1사단의 병력들이었다. 17일 밤이 지나자 이 카시노는 완전히 연합군에게 넘어갔다.
(한 독일군 참전자의 증언)
"난 카시노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은 날 부상을 당했다. 퇴각 명령은 17일 밤에 떨어졌다. 나와 병력들은 Rocca Janula를 통해서 수도원 계곡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정상에 도달했을 때 근처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난 아주 밝은 섬광을 보고 기절했다.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 내 다리가 부상을 입은 채 부어오르고 있었다. 난 기어서 의무대피소를 찾았다. 의무소는 수도원의 지하에 있었다. 다행이 그곳에 도착해서 밤 동안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18일 동트기 전에 부상자를 제외한 병력들이 마지막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아마 9시 30분 쯤, Kazimeriz Gubriel가 지휘하는 폴란드군 소대가 들어와서 수도원을 접수하고 우리를 포로화했다. 우리 부상자 중에 중상자 3명을 제외한 걸을 수 있는 부상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점심시간에 많은 연합군 지휘관과 미군인 기자들을 만났다. 미스터 테트로라는 하얀고 깨끝한 트렌치 코트를 입은 연합군 기자가 우리에게 와서 짧막한 독일어로 물었다. 난 배고프고, 아프고, 기력이 고갈되었고, 더럽고 불결한 상태였다. 난 그가 깨끝한 것에 화가 났다. 그 역시 우리를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우리를 잡은 연합군 지휘관은 우리를 아주 잘 대해줬다. 난 전후에 그를 만났고, 그가 1992년 1월 27일 사망할 때까지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다."
몬테 카시노의 지휘관인 Hauptmann Herbert Karl Beyer (commander I/FJR4)역시 심각한 부상상태였다. 폴란드 군은 아주 편하게 수도원으로 입성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깃발을 들고 들어왔지만, 이미 수 없는 산 재물들을 받친 뒤였다. 폴란드군만 해도 천명 정도가 거기서 죽었다. 그리고 3천명이 부상했다. 연합군은 구스타브 라인에서 전사-부상 토탈 2만명을 잃었다. 카시노에서 나온 독일 1낙하산 사단은 이후로도 계속 추격하는 연합군을 괴롭히면서 독일군 후미를 맡았다. 특히 팔슐름야거의 역매복은 추적하는 연합군 병사들을 괴롭혔다.
구스타브 라인의 책임을 맡았던 독일군 10군은 새로운 6마일 후방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만들었다. 방어선의 명칭은 Hitler/Dora line이었다. 구스타브 라인과 병력도 거의 차이가 없었다. 방어선은 반 마일 두께였다. 그 반 마일안에 대전차 지뢰와 전차 저지용 도로대화구, 토오치카, 부비트랩 등이 설치됐다. 이 방어선에서 제 3의 방어선은 바로 카이사르 방어선이라고 불리는 것이었고, 이것은 알반 언덕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은 로마로부터 20마일 서쪽에 있었다. 그러나 이 히틀러/도라 방어선은 연합군의 진출을 구스타브 라인처럼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방어선의 북쪽은 독일군 10군이 보충하고 있었고, 동쪽은 독일군 14군이 막고 있었는데, 이 독일군들은 안지오로부터 진출하는 연합군 대부대와 회피하려 했다. 결국 후퇴했고, 그들은 다시 Gothic Line을 만들었다. 이 라인은 라 스페지아에서 시작해서 서쪽의 페사로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200마일의 길이였다.
독일군들은 후퇴하면서 교량을 파괴하고, 도로에 지뢰를 가설하고 역매복을 기습적으로 시도해서 연합군의 공격을 지연시켰다.
5월 23일, 미 6군은 안지오 해변을 돌파해서 내륙으로 진출했고, 25일에는 미 2군과 만났다. 안지오에 있던 독일군 14군은 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부분적으로 미군에게 포위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14군은 결정적인 미군과의 결전을 회피했고, 이것으로 인해서 미군은 로마에 입성하게 된다. 미군은 로마에 1944년 6월 4일에 입성했다. 잔여 독일군은 미군이 로마에 입성할 때 로마의 끝자락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키시노의 독일군 1낙하산 사단의 병력들은 굳은 의지와 투철한 전투력으로 "카시노의 푸른 악마"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구스타브 라인의 독일군(1944 1-5월)
독일 10군.
LI Gebirgs 군단-5사단. 44보병사단. 1낙하산 사단.
XIV 기갑군단-71보병사단. 94보병사단. 15기갑 척탄사단.
예비대-90기갑척탄 사단.
연합군 5th Army Group -알렉산더 장군.
US 5th Army - General Clark
US 2nd Corps - General Keyes
French Expeditionary Corps - General Juin
British 8th Army - General Leese
British 5th Corps - General Keightley
British 10th Corps - General Mc Creery
Polish 2nd Corps - General Anders
British 8th Corps - General Kirkman
Canadian 1st Corps - Reserve Corps - Lt General Burns
(과거에 로보캅이란 영화가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Corps 란 명칭이 '군단'을 뜻하는 명칭임을 누가 (자상하게도)알았는지. 어느 잡지에서 곧 '로봇 군단'이란 영화가 나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 또 보로트처럼 충직하게(필살의) 싸우는 전쟁영화가 나오는 구나'하고 좋아했습니다. 알고보니 로보트 태권브이가 실용적인 축소모드로 개발된 버전이더군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역시 로보트는 사람이 타서 조종해야한다. 로보캅 2탄인가에서는 감전인가를 먹더니 반역까지 저지르죠? 우리나라도 2개 군단이 나오는 영화가 있었죠?)
사실 이 몬테 카시노에서의 팔슐름야거는 일개 보병 무장의 부대였고, 낙하산 작전을 펼친 것도 아니다. 그리고 혁혁한 전사자 대비율을 보인 것도 아니다. 팔슐름야거도 2/3이상이 죽었다.(물론 전사자는 연합군이 훨씬 많다) 그리고 이 몬테 카시노란 전투는 수도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건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공중폭격. 함포사격. 포병 사격에도 포격후에 다시 나타나서 방어를 하는 독일군을 목격하고, 연합군은 논리적으로 그들을 설명할수가 없었다.
반드시 필슐름야거라기 보다는, 그때까지 분명히 존재하던 독일군의 강력한 전투의지와 명령체계, 그리고 사수의 결의를 말한다고 할수가 있다. 모든 전쟁과 전투에서 여러가지 실패들은 교훈을 삼고, 성공과 의지는 본받을 만한데, 이 당시 몬테 카시노에서 싸운 독일군의 정신력과 전투의지는 나찌의 잔학과 여타 부정적인 사건과는 별개로, 본받을 만한 군인정신이라고 생각되는 군요.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합리적인 판단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찌가 저지른 행동으로 독일군의 군인정신이 평가절하 되어서도 안되고, 과감한 전투의욕이라고 해서 그것이 자칫 독재와 전세계를 피로 물든 사건들까지 망각하는 경우는 없어야 합니다.
출처:디펜스코리아 잇빨중사 ( tooth8020@defence.co.kr )
2002년 01월01일 메일뱍스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s://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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