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당시 일본육군과 해군의 관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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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1월 일본의 경제가 큰 혼란에 빠지자 내각기획국과 상공성이 폐지되고
군수성이 창설되었다. 두 군대의 반목으로 생긴 혼란을 바로잡는다는 특수한 임무를 띤
군수성은 도조 히데키를 대신으로 하는 새로운 기구였다.
전쟁물자 생산에 관여하고 있던 민간회사들은 명예로운 것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는 "군수공장" 이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최종적으로 671개의 공장이 이 이름을 받았다. 군수성은 이 군수공장의 생산계획을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군수성은 군수공장의 자금을 관리할수 있었고,
군수공장을 통폐합할 권한도 있었다.
그러나 군수성은 보기좋게 실패했다. 그것은 대신이 짧은 기간동안 여러번 바뀐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도조는 곧 그 일에 열정을 잃었고, 대신 자리를 차관인 기시 노부스케에게 넘겼다.
기시 다음엔 미쓰이 재벌의 공업 담당이던 우수한 경영자 후지하라 긴지로가 대신이 되었지만,
그는 실망하여 물러났고, 후임으로는 타협적인 관료인 요시다라는 인물이 앉았다. 후지하라는 설명한다.
"문제는 육,해군 모두에게 잘 보이는 인물을 대신에 앉히는데 있었다. 그래서 육,해군은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요시다에게서 타협점을 찾았다. 그들은 요시다를 앉힘으로서 자기들 마음대로 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전쟁 기간 동안 육, 해군이 연합 사령부를 필요로 한다는것은 명백했지만, 어느쪽도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 직후 다타기 소키치 해군소장은 해군 총참모부에 대해 최고사령부 밑에서 육, 해군이
통일된 활동을 해야만 이길수 있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양측은 심지어 같은 전투구역 내에서도 협력하지 않았다.
전투구역에 대한 지배권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육군과 해군에게 부여되었다. 육군이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책임을 맡았지만, 해군도 뉴기니의 반쪽과 솔로몬 군도, 셀레베스 군도, 신탁통치령인 마샬, 캐롤라인, 매리애나 군도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쪽도 남의 관할권에 있는 지역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태도가 1944년 사이판을 잃게 되었다고 가토 기자는 말했다. 가토는 이렇게 썼다.
"일본 해병대는 해군에게 맡겨진 지역을 충분히 방어할 병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육군의 지원은 적절하지도 못했고 무성의했다."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도 협조적일 수가 없었다. 야마모토 제독의 미드웨이 작전의 일환으로 육군은
알류산 열도의 애투섬을 점령하고 요새화했다. 해군은 상륙에 반대했고 즉각 비판하기 시작했다.
오니시 다케지로 해군중장은 말했다.
"우린 그저 애투섬에 포격을 가한 다음 물러났어야 했다. 그런데 땅에 집착한 나머지 너무 많은 물자와 불필요한 인원을 쏟아부어 결국은 떠날수 없게 되었다."
그 "불필요한 인원" 2300명은 미군이 1943년 5월 애투섬을 재탈환했을때 오도가도 못하고 전멸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애투섬 전멸의 소식을 듣고 크게 우려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채 시종무관에게 물었다.
"육군과 해군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가? 그들 사이에 갈등이 있다면 이 전쟁은 성공할수 없을 것이야."
천황의 생각은 참으로 옳았다. 도조 수상이 그 방대한 관료기구를 움직이려고 헛된 노력을 하고,
경찰에 의한 탄압의 촉수가 전국에 뻗쳐있는 상태에서, 인력에서나 무기에서나 열세인 일본은 패전의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최악의 악몽과도 같은 시기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사기만은 왕성했던
일본 국민들은 이제 육군과 해군의 불화로 생긴 결과들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끝-
<참고자료:타임 라이프>
2002년 02월20일 제ss기갑사단장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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