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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덴느 대공세 - 라인강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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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겨울, 독일군은 그 해 6월 6일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서부전선에서 패주를 거듭하고 있었다. 일부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전선에서 독일군이 너무나도 급히 후퇴한 나머지 연합군은 프랑스와 독일 국경 부근에서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 필요한 장비와 탄약, 유류, 인원의 수송이 진격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연합군은 보급 지연으로 지체된 진격 속도를 만회하기 위해 9월 17일에 마켓-가든(Market-Garden) 작전을 실시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작전 실패로 인해 연합군의 진격은 사실상 정지되고 말았으며, 그것은 곧 1944년이 끝나가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아직 1,000만에 가까운 병력을 무장시키고 있었으며, 9월과 10월에 해군과 공군의 병력을 육군으로 편입시키고 징집연령을 15세부터 60세까지 확대함으로써 추가로 25개 VGD(Volksgrenadier Division:국민척탄병사단)를 편성할 수 있었다. 주1) 유류 부족이 심각했지만, 독일의 군수산업은 1944년 하반기에 월간 생산량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총통 히틀러(Hitler)는 여기에서 도박을 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서부전선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영/미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후, 그 전력을 다시 동부전선으로 돌려 소련군과 대결한다는 전략이었다.


9월 4일에 서부전선총사령관으로 재임명된 폰 룬트슈테트(von Rundstedt) 원수는 히틀러로부터 11월 초에 이러한 계획을 통보받았다. 폰 룬트슈테트는 곧 가용한 전력이 그러한 공격을 수행하기에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아헨(Aachen) 지구에 대한 제한된 공격을 실시하자는 작은 해결책을 의견으로 제시했으나, 결국에는 히틀러의 의지에 의해 원안대로 작전 계획이 수립되게 되었다. 그 결과 OKW(Oberkommando der Wehrmacht:국방군최고사령부)는 800여 대 이상의 전차를 장비한 9개 기갑사단을 포함해 총계 28개 사단을 작전 지역인 아르덴느(Ardenne)에 집결시켜 반격을 가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아느덴느 약 75마일(120km)에 달하는 전선에 연합군이 고작 4개 사단만을 배치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2일, 히틀러는 직접 자신의 치겐베르그(Ziegenberg)사령부로 야전사령관들을 소집해 '라인강을 보라(Die Wacht am Rhein)'라는 이름으로 계획된 이 최종 작전의 명령을 하달했다. 보안을 유지하게 위해 '라인강을 주시하라'라는 방어적인 성격의 명칭이 붙여졌던 반격 작전의 개시 예정일은 12월 16일이였다. B집단군 예하의 6SS기갑군이 주공으로 안트워프(Antwerp)를 점령하고, 5기갑군이 조공으로 브뤼셀(Brussel)을 향해 나아간다는 전략이었다. 보병사단 주축의 7군과 15군은 각각 5기갑군과 6SS기갑군의 좌우익을 엄호해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미군에게 있어 적어도 독일군의 공격 직전까지의 아르덴느는 휴식의 공간이었다. 총 6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이중 제4보병사단과 제28보병사단은 휘르트겐 숲에서의 격전으로 큰 손실을 입었던 상태였으며, 제99보병사단과 제106보병사단은 막 전선에 배치된 신참 부대였다. 이들 8만3천의 병력은 420여대의 전차를 장비하고 있었으나, 담당하고 있던 전선의 길이기 길었으므로 매우 빈약한 수준이었다. 독일군이 장비와 탄약을 계속 집결시키는 동안 연합군은 아르덴느라는 휴양지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944년 12월 16일 05시 30분. 독일군은 1940년 5월에 프랑스 전선을 돌파할 때 보여 주었던 전격전의 신화를 아르덴느 전선에서 또다시 완벽에 가까운 초반 기습으로 재현해냈다. 자욱한 안개와 불순한 일기가 독일군의 공격을 은폐시켰으며, 연합군 공군기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했다. 선두 돌격대대의 침투에 이어 16시에 본대 전차부대의 진격이 개시되었다. 구름에 반사된 고사포부대의 탐조등 불빛의 도움을 받아 전차부대가 진격해 들어갔으며, 백색의 동계 위방복을 착용한 기갑척탄병부대는 미군 진지 수십미터까지 접근한 후에 순식간에 돌격을 감행했다.


모든 전선에서 독일군이 안개를 뚫고 전진해 온고 있다는 보고가 연합군 사령부에 빗발치기 시작했다. 공격 직전에 펼쳐진 독일군 포병들의 공격준비사격은 라인강을 건너 후퇴하려는 독일군의 단순한 발악으로 치부되었다. 때문에 독일군 지상부대가 기습공격을 개시하자 미군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들의 진지를 내주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17일에 실행되어 사실상 실패한 독일군 최후의 공수 작전에 의해 더욱 가중되었다. 공수 작전 자체는 사실상 실패하였으나, 매우 엶게 그러나 폭넓게 산개한 약 1천 명의 독일군 공수부대원들을 관측한 미군들이 스스로 전선 후방에 대한 독일군의 대규모 공수 작전이 감행된 것으로 잘못된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가 원한 것은 뮤즈(Meuse)강을 건너 브뤼셀을 탈환하고 계속 진격하여 안트워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아르덴느를 진격하는 것은 최악이었다. 눈은 허리 깊이까지 쌓여 전차를 배치할 만한 공간조차 없었다. 08시가 되기까지는 날이 밝지 않았고 16시가 되면 해가 졌다. 급거 편성된 부대들은 어린 아이들과 병든 노인들로만 구성되었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 무장SS 상급대장 젭(Sepp:Joseph) 디트리히


그러나 독일군의 상황은 생각보다 여유로운 편이 아니였다. 극심한 교통 체증 때문에 당초 시간계획표에 따라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예상외 분전도 눈부셨지만, 무엇보다 독일군에게 작전 수행을 어렵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한 것은 험한 도로와 연료 부족이었다. 비좁은 진흙탕 도로에 수많은 전차와 장갑차, 차량들이 모여들어 신속한 기동을 어렵게 했는데,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원인은 지나치게 보안에 치중한 나머지 미리 작전 계획을 하달하지 않아 야전 지휘관들에게 전투 개시 직전에 충분한 지형 탐사와 진격로 설정 등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보장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도상(圖上)에서 계획이 수립되어 실제 지형과 지도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았던 것도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주공인 제6SS기갑군은 처음 2일동안 신속한 돌파에 성공했으나 곧 아이젠보른(Eisenborn)에서 미군 제5군단의 심각한 저항에 부딪쳐 진격 속도가 크게 저하되고 말았다. 때문에 제6SS기갑군은 당초 계획인 북서쪽 리에주(Liege) 방향으로의 진격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공격로를 수정하였다. 공격 1일차에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던 생 비트(St Vith)를 공격 7일차인 22일이 되어서야 점령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의외로 성공적인 전과를 올린 부대는 남쪽의 조공인 제5기갑군이었다. 보병 부대를 선두에 내세워 완전한 기습을 달성한 후에, 18일에 바스토뉴(Bastogne) 근방까지 진격하고 20일에 호우팔리즈(Houffalize)를 점령하여 미군 제8군단을 제압하고 본래의 계획에 따라 나무르(Namur)를 향해 순조로운 진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공격 3, 4일차에 제12SS기갑군단을 제5기갑군 지역에 축차 투입했다.


연합군의 반격은 22일부터 시작되었으나, 독일군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좌절되기 시작한 것은 23일부터였다. 그동안에는 자욱한 구름과 안개 때문에 연합군 공군기의 활동이 불가능했지만 이날 아침부터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면서 하늘이 맑게 개이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5천 대 이상의 연합군 항공기가 독일군을 공습했으며, 이로 인해 독일군의 손실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특히 바스토뉴를 사수하고 있던 미군 제101공수사단(Screaming Eagles)과 제10기갑사단 B전투단의 저항은 매우 강력해서 독일군은 끝내 이 작은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는데 주3), 제5기갑군의 선두에 있던 제2기갑사단과 기갑교육사단의 진격도 결국 이 후방의 바스토뉴 돌출부 때문에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고 말았다.


(생 비트와 함께 교통의 요지로 주목되었던 바스토뉴에 미군 제101공수사단이 급거 투입된 것은 12월 18일 오전이었다. 이어 미군 제10기갑사단 B전투단도 투입되었는데, 이 바스토뉴를 점령하기 위해 전개된 독일군 부대는 기갑교육사단과 제26국민척탄병사단, 제2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제47기갑군단이었다. 동월 22일에 바스토뉴를 완전 포위한 독일군 제47기갑군단장 폰 뤼트비츠(von Luttwitz) 기갑대장은 기갑교육사단을 경유해서 제101공수사단장직을 임시 수행하고 있던 부사단장 맥올리프(McAuliffe) 준장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항복 권고에 대한 미군의 회신은 "Nuts!(제기랄!)"였으며, 독일군은 수십 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바스토뉴 시내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26일 오후에 미군 제4기갑사단 예하 A와 B, R전투단이 바스토뉴에 대한 독일군의 포위를 풀었다.)


제2기갑사단이 뮤즈강 동쪽 수 Km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기갑교육사단이나 제116기갑사단과 같은 좌우측면의 부대가 동일한 수준의 진격 속도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2기갑사단 단독으로 연합군의 모든 저항을 감당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더해 미육군 중장 패튼(Patton)이 지휘하는 제3군이 제7군이 담당하고 있던 전선을 강타하기 시작하자 제5기갑군 사령관인 폰 만트이펠은 제7군을 지원하기 위해 부대 일부를 남쪽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스토뉴에 대한 연이은 공격도 모두 실패로 끝나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제5기갑군의 전력이 전방으로 집중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사실상 이 시점에서 독일군의 공세는 종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2월 24일에는 지각력 있는 어떠한 지휘관들에게도 이 공세가 마침내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되었다." - 육군참모총장 상급대장 구데리안(Guderian)


따라서 더 이상의 전과 확대가 불가능했으므로 독일군 지휘관들은 공세 중단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미 22일에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B집단군 사령관인 모델(Model) 원수는 모든 공세가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곧 있을 동부전선에서의 소련군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예비대를 확보해야 한다며 작전을 중단할 것을 히틀러에게 건의했으나, 히틀러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공격을 재개할 것을 거듭 명할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28일이 되어서는 그 자신도 진격 중단을 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퇴를 허가하지는 않았으므로 독일군은 고착된 전선을 그대로 사수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1월 1일에 실시된 연합군 공군에 대한 독일 공군의 마지막 대공습인 보텐플라테(Bodenplatte) 작전도 실패로 끝나고, 남쪽에 가중되고 있던 미군 제3군의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실시되었던 알자스(Alsace) 지역에서의 견제 공세도 아무런 성과 없이 좌절되자, 1월 8일에 히틀러는 '라인강을 보라' 작전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깨닫고 모델 원수에게 전군에 대한 후퇴를 허가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8일 후인 1월 16일에 미군 제1군과 제3군이 절단면 연결에 성공함으로서 전선(戰線)은 공세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12월 16일에 공격을 시작한 지 불과 1개월만에 서쪽으로 70Km 지점까지 진격했던 공세가 무위로 끝나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이였다.


아르덴느 공세에서 독일군과 연합군 양측이 입은 손실에 대한 자료는 명확하지 않다. 독일군은 약 7만의 사상자와 5만의 포로, 전차 및 돌격포 6백 대, 차량 6천 대, 항공기 1천6백 대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연합군은 약 2만의 포로를 포함해 7만 7천의 인원 손실을 입은 것으로 발표되었다. 독일군의 패인은 공격을 성공시키기에 부적절한 전투력과 유류 및 수리부속품의 부족, 제공권 상실 등이었다. 히틀러가 예비대인 제2SS기갑군단을 작전 성공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제5기갑군에 후속 투입하지 않고 기존의 주공으로 설정되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제6SS기갑군에 투입했던 것도 하나의 패착이었다. 폰 룬트슈테트와 모델 원수는 조공인 제5기갑군에 투입하여 공격 기세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전투로 독일군의 가용 예비대가 모두 소멸되었으므로 1월 12일에 개시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로 인한 동부전선의 대참사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아르덴느 반격 작전은 실망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인원과 물자에 있어서 과도한 손실을 입었으며, 얻은 것이라고는 연합군의 진격을 다만 몇 주간 중단시킨 것에 불과했다." - 제9기갑사단장 소장 폰 멜렌틴(von Mellenthin)

* 전투에 참가한 독일군 전투부대 가운데 특별히 이름을 남긴 부대가 2개 있다. 하나는 제1SS기갑연대장인 무장SS 중령 파이퍼(Peiper)가 지휘하는 제1SS기갑사단의 '파이퍼 전투단(Kampfgruppe Peiper)'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무장SS 중령 오토 스코르체니(Otto Skorzeny)가 이끌었던 특수임무부대인 '제150기갑여단'이었다. 파이퍼 전투단은 제1SS전차연대 제1대대와 제501SS중전차대대, 제2SS기갑척탄병연대 제3대대, 제1SS기갑포병연대 제2대대, 제1SS기갑공병대대 제3중대, 공군에서 지원 배속된 제84돌격고사포대대 등으로 구성되어 독일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중전차대대의 티거2 전차 20여 대와 전차연대의 판터 42대, 4호전차 37대, 완벽하게 기계화된 척탄병연대와 고사포대대가 전투력의 핵심이었다. 파이퍼 전투단은 12월 17일에 말메디(Malmedy) 근교에서 항복한 미군 약 129명을 학살하는 오명을 남겼으며, 공격 5일차인 동월 20일에 전력이 소진되어 전선을 이탈했다.


* 제150기갑여단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독수리 머리와 날개에 사자의 몸을 한 새를 지칭하는 '그라이프(Greif)'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 작전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병력을 미군 후방에 투입하여 공격로에 위치한 뮤즈강의 주요 교량과 도로교차점을 점령하는 한편, 미군 지휘와 통신 계통을 교란시킨다는 매우 과감한 계획에 기초한 것이었다. 제150기갑여단은 노획한 미군 차량과 개인장비, 그리고 미군 장비처럼 보이도록 개조한 전차와 장갑차, 2천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나, 역시 다른 부대들과 마찬가지로 공격 개시 직후 전전선에 닥친 심각한 교통 체증으로 인해 당초 기대한 성과를 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들 부대원 중 일부는 프랑스 파리(Paris)의 연합국원정군최고사령부(SHAEF)에 있던 아이젠하워(Eisenhower) 대장를 암살하기 위해 침투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미군 후방을 매우 혼란하게 만들었다. 적군의 전투복을 입고 교전에 참가하는 것은 간첩 행위에 해당하는 제네바 협정 위반 사항이므로 이들 대부분은 체포 즉시 바로 총살형에 처해지거나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다.


* 참고문헌

기갑전투(機甲戰鬪:Panzer Battle), von Mellenthin著, 민평식譯, 병학사, 1985.02.25 초판

기계화부대장(機械化部隊長:Panzer Leader), H. Guderian著, 김정오譯, 도서출판 한원, 1990.08.16 초판

도해세계전사(圖解世界戰史), 노병천著, 도서출판 한원, 1990.05.01 3판

불꽃의 기사, 모토후미 고바야시(小林源文)著, 최형식譯, 초록배매직스, 2000.07.21 초판

알기쉬운 세계제2차대전사 권6, 이대영著, (주)호비스트, 1999.10.30 초판

제3제국의 흥망 권4, 윌리엄 L. 샤이러著, 유승근譯, 에디터, 1993.09.17 초판

20세기 대사건들, 리더스 다이제스트, (주)동아출판사, 1989.08.20 8판



2001년 11월23일 멍텅구리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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