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본격적 시작 - 스탈린그라드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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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월드워 계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당시 겹치는 글이 있어서 비교적 간탹하게 썻습니다.
1)스탈린그라드전야
1941년의 바르바로사작전에서 최종목표인 모스크바점령에 실패한 히틀러는 전략적으로 스탈린의 약점을 노렸다.
히틀러가 보기에 소련의 약점은 소련의 주요 유류공급처였던 마이코프,그로즈니,바쿠등의 유전지대를 포함하는 코카서스(카프카스로 쓰는 책도 있더군요)지역이었다.이 일대의 수송로는 철도편일부와 볼가강에 의한 수송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독일군이 코카서스의 관문인 로스토프를 점령하여 그들의 수송로를 차단하고 볼가강서안을 장악하면 소련군의 유류보급을 차단하고 동시에 바쿠유전의 점령이 가능하다면 독일의 유류난이 해소될 수도 있었다.(알기쉬운 2차대전사에서는 이 당시 히틀러가 소련전토의 점령을 포기하고 히틀러가 자원이 풍부한 남부지역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하였다고 말합니다만 설사 그렇다 해도 일단 소련굴복의 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또한 2차적으로 당시 중립국이었던 터키를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당시 롬멜과 격전을 벌이고 있던 영국군을 압박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거리상 그게 가능했을진 의문이지만)
이당시부터 히틀러는 전선에 대한 직접통제를 강화하여 독일이 장성들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보이던 임무형전술의 원칙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일단 독일의 하계공세계획 블라우작전은 다음과 같았다.
1단계,제2군과 4기갑군이 쿠르스크방면에서 양익포위를 실시 ,적을 소탕후 2군은 방어강화하고 4기갑군은 남하한다.
2단계,4기갑군과 하르코프방면에서 진군한 제 6군과 합류 포위망을 구축한 뒤
3단계,2단계작전의 완료후 돈강을 따라 남동쪽으로 진군하여 로스토프에서 도네츠강을 따라 진군한 17군및1기갑군과 합류하여 돈강유역의 소련군을 소탕한다.
4단계,작전뒤 4기갑군과 6군은 스탈린그라드,1기갑군과 17군은 코카서스로 진군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원래 스탈린그라드공격은 원래 코카서스공격의 측후방엄호를 위한 지역확보를 위한 2차적목표였지만 스탈린의 도시라는 상징성때문에 결국 2차대전의 한 전환점이 되는 전투로 남게 되는데..........
일단 하계대공세의 후방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히틀러는 세바스토플공략에 나섰다.일단 크림반도를 장악해서 흑해를 장악하고 공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함이었다.이미 전년도부터 세바스토플 공략을 수차례 시도했지만 독일군에서 손꼽히는 명장만슈타인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세바스토플은 끝끝내 버텨내고 있었다.6월부터 초대형화포도라와 칼까지 포함된 600문(800문이라는 책도 있었음)의 화포를 동원한 대공세끝에 세바스토플을 확보할 수있었지만 독일군도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이시기에소련군은 하르코프에서 일대 반격을 시도했다.
(이건 제가 가진 자료보다 이정훈의 독일군사이트에 묘사된게 더 자세해서 원문을 그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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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과42년 겨울동안 전선은 상당히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였고 히틀러는 42년 하계공세를 하르코프에서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한편 소련군 일반참모본부Stavka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모든 독일군의 공세가 예상되는 지역에서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5개 군이 하르코프 남서쪽 120km에 위치한 도네츠강을 도하하여 도시전체를 감싸기에 충분한 커다란 주머니 모양의 대형을 만드는 복잡한 작전을 구상하였다. 42년 5월 12일 이 작전은 티모센코Semyon Timoshenko원수가 지휘하는 남서집단군South-West front에 의해 실행에 옮겨졌다. 티모센코는 집단군을 깊숙이 진출시킨 후 5월 17일 2개의 전차군단으로 하여금 하르코프로의 진격로를 개척하도록 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독일 제1장갑군과 제6 군은 도네츠강을 따라 남과 북에 걸쳐 집중공격을가하기 시작하였다. 5월 20일 독일군의 돌진에 놀란 티모센코는 하르코프를 25km남겨 둔 지점에서 전차군단에게 정지명령을 하달했지만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3일 후 소련군 2개 전차군단은 독일군이 설치한 올가미에 완전히 걸려들었고 마침내 5월 28까지 독일군은 티코센코에게 1,200대의 전차와 사상자 25만명(작전에 참가한 100만명 중)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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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코프의 승리와 함께 블라우작전이 시작되었다.7월7일까지 2단계작전까지를 완료한 히틀러는 남부집단군을 해체하고 A,B집단군을 새로 편성했다.사령관은 리스트와 보크가 임명되었다.3단계에서 히틀러는 애초계획에서 도네츠를 따라 북동쪽으로 진군하게 예정되었던 1기갑군및 17군의 계획을 취소하고 남방으로 진격시키는데 이런 즉흥적 계획에 보크가 항의하자 즉시 그를 해임하고 바이크스를 임명한다.이에따라 돈강유역의 소련군 섬멸에 실패하고 점령하는데 그친다.다음단계에서 히틀러는 다시 실수를 범하는데 스탈린그라드로 쾌속진격중이던 4기갑군을 로스토프방면의 1기갑군의 원조로 돌려버리는 대실수를 범한다.이에 따라 4기갑군이 다시 돌아와 있을때 스탈린그라드의 방어태세는 재정비되었다.
한편 코카서스로 진격하던 A집단군은 마이코프와 모쯔토크까지의 점령에 성공했으나 험준한 산세와 소련의 초토화전술로 진격이 정체된다.
한 편 8월에 6군도 볼가강변에 도착하여 스탈린그라드전투의 본격적인 개막이 다가온다............
이제 독일군의 공격목표가 된 스탈린 그라드는 어떤 도시인가?
스탈린그라드의 원래이름은 차리친이었지만 스탈린이 1차대전의 적백내전에서 스탈린이 전공을 세운뒤 특히 애착을 가져 스탈린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뒤 산업시범도시로 지정되어 인구 60만이 넘는 도시로 발전해 공업의 중심지의 한 역활을 하고 있었고 개전후 전차와 각종 군수물자의 주생산지의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T-34의 생산형식중 스탈린그라드 생산형으로 분류되는 형식도 있다.).거기다 이런 위치와 앞서 말한 전략적 가치를 넘어 스탈린에게는 자신의 이름이 걸린 도시라는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돈강만곡부로 철수한 모든부대를 모아 새로 스탈린그라드전선(방면군이라고 표현한 책도 있습니다만 디코에서 김추성님의 리플에 따르면 방면군은 2차대전 초기에만 사용되었으므로 중기에 방면군이라 표기한 부분은 전선을 의미한다고 합니다.전선은 독일군으 집단군에 해당하는 단위입니다.)을 편성하고 티모센코원수,고르도르프중장을 차례로 기용했다가 8월 2일 예레맨코 대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예레맨코는 평소 스탈린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으며 부상을 무릅쓰고 스탈린에게 완쾌되었다면 서 전선에 출전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스탈린의 참모가 그의 다리저는 모습을 보고 아직 불편한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완강히 부인했고 스탈린의 "예레맨코동지의 상처는 완쾌된 것으로 합시다."라는 한 마디에 즉시 스탈린그라드전선에 부임했다.
먼저 그는 주민들을 총동원 외곽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취약한 남쪽 구릉지대에 64군을 투입했다.
독일군은 제 8항공단 리히트호펜의 대공습과 함께 8월 23일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무너진 건물을 이용해 엄페하면서 격렬하게 항전했고 그 와중에도 스탈린그라드의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T34신품을 생산해 병사들과 그야말로 눈물겨운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독일6군은 방향을 바꾸어 서쪽측면에서 돌입을 시도했으나 소련군은 화염병을 이용,전차 27대를 격파하면서 끈질기게 버텼다.사기를 잃고 도망가려는 병사는 무자비하게 즉결처분하면서 소련군은 전선을 유지했다.9월8일 독일4기갑군의 일부가 남부에서 맹공을 가해 볼가강변에 도달,소련 62군을 시내에 가두었다.(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스탈린 그라드는 후방에 강이 있었고 소련군의 강가 교두보를 완벽히 무너뜨리지 못해 독일군은 완벽한 포위망을 갖출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62군사령과 로바틴 중장이 자신을 잃고 완곡하게 스탈린그라드에서 철수를 건의하자 예레맨코는 즉시 그를 해임하고 9월 12일 추이코프중장을 사령관에 임명했다.추이코프는 적백내전에서 뼈가 굵은 사나이로 그의 전술의 기본은 복싱으로 하면 인파이팅 독일군에 시가전에서 달라붙어 백병전을 벌인다는 것이었다.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 훈련상태,장비 모든것이 뒤진다....이런 면을 상쇄하려면 ?바로 시간전의 환경을 이용,거친 육박전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9월 13일부터 공격을 재개한 독일군은 이런 소련군에 맞서 여태까지 경험한 전투와 다른 지독한 시가전에 빠져들어야 했다.이집,저집 옮겨 다니면서 싸우는 독일군에 맞서 전차는 무너진 건물더미 때문에 자유로운 움직임이 불가능했고 그들의 높은 훈련수준과 팀워크는 이런 난전에서 효과를 볼수 없었다.
추이코프는 병사들을 10명안팎의 '돌격대'라는 단위로 쪼개 철저한 근접전을 유도했고 이런 방침은 제공권을 쥔 독일군의 지원 폭격을 방지할 수도 있었다.돌격대는 주요교차로의 빌딩내에 방어거점을 구축하고 하수도와 다락방을 통해 신출귀몰하게 이동하면서 독일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10월에 접어들면서 날씨가 추워지면서 강의 결빙이 시작되었다.이기간은 소련군에게 참으로 난처한 기간이었는데 그때까지 독일군의 공습을 무릅쓰고 소량이나마 이어지던 볼가강의 보급선을 통한 보급이 떠다니는 얼음때문에 완전히 정지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대신 그기간을 참고 넘기면 완전히 언 강을 통해 원할한 보급이 가능해진다는 점이었다.추이코프는 완전히 보급이 정지되는 시간을 위해 군용초콜릿 12톤을 비축했다.
11월 10일 독일군은 시내의 90프로를 손에 넣었고 격렬한 시가전이 계속되었다.14일 추이코프는 완전히 얼지 않은 강을 깨고 임시로라도 보급을 재개하지 않으면 전멸할 수 밖에 없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시간에 강저편에 소련군의 원군이 없었다.
11월 19일 독일군 후방의 양익에서 거대한 포성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스탈린그라드전투의 양상이 뒤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사력을 다한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의 뒤에서 소련의 명장 주코프와 바실리예프스키는 일대 반격전을 계획하고 있었다.일단 독일군을 최대한 스탈린그라드로 끌어들이고 그사이에 독일군의 양익에서 일대 반격을 감행 오히려 독일 제 6군을 포위해 버린다는 계획이었다.(이 계획의 주담당자는 사실은 바실리예프스키였고 주코프의 전공은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스탈린은 이 공격계획에 만족하고 작전명을 우라노스(천왕성)으로 명명했다.이 작전에는 여러가지가 고려되었다.일단 철저한 보안과 독일군정찰기에 의해 병력이동이 파악되지 않도록 물자와 병력의 이동은 야간에 철저히 분산되어 이루어졌고 전차기동이 용이하도록 땅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시기와 영국군의 앨알라메인 반격과 비슷한 시간대를 선택하도록 노력했다.
독일군이 시덥잖게 여겨 후방을 지키고 있던 루마니아군(코카서스를 공격하던 클라이스트도 후방의 취약을 지적)은 독일군의 예상대로 쉽게 무너져 독일군의 후방은 포위되었다.(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독일군은 이때 루마니아군을 구원하기 위해 22기갑사단을 동원하려고 했는데 겨울을 피해 전차안에 쥐떼들이 몰려들어 전차의 전기배선을 갉아 먹어 제 때 독일군이 출동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이 이야기는 알기쉬운 2차대전사엔 정설인 것처럼 실려 있지만 논란이 많은 여담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포위 초기에 파울루스는 탈출허락을 요청했지만 공수보급을 받으면서 봄까지 현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고집에 위치고수를 택했다.
공군실무자들은 이 안에 모두 불가능을 표시했지만 허영심많은 공군원수 괴링의 장담으로 공수보급작전이 시작되었다.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6군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 하루 700톤의 보급이 필요했지만 수송기가 모자라 폭격기까지 동원했음에도 하루수송량은 100톤을 조금넘는 정도에 불과했다.거기다 행정상 착오로 정작 필요한 식량이 아닌 피임기구,박하,후추,철모,군화등이 오는 일이 수두룩했다.(딴 건 몰라도 피임기구는 도대체 왜 보낸거야?)
이런 상황에서 독일군은 명장 만슈타인을 새로 돈집단군사령관에 임명하고 6군 구출을 명했다.(웃기는 건 이 돈 집단군의 주력부대가 6군과 4기갑군이어서 만슈타인이 운용가능한 병력은 4기갑군의 일부에 불과했다.)
12월12일에 만슈타인은 구출 작전을 시작했다.작전이름은 북풍이었고 포위망에서 6군의 호응작전은 천둥소리로 명명되었다. 19일에 스탈린그라드근방까지 육박해 들어갔으나 6군의 탈출을 허락하지 않은 히틀러에 의해 6군은 그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몰려드는 소련군에 숫적으로 밀린 만슈타인은 어쩔 수 없이 후퇴한다.
이제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의 6군이 문제가 아니라 남부의 전선자체가 무너져 버릴 위기에 처했다.이대로 전선이 무너져 로스토프가 함락되면 독일군은 코카서스의 A집단군마저 포위되어 버린다.따라서 만슈타인은 이제 남은 병력으로 로스토프를 지켜내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12월 29일 히틀러는 장군들의 건의에 마지못해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의 철수를 허가했으나 이시점에서 클라이스트는 로스토프에서 350마일 거리나 떨어져 있었고 소련군은 50마일 거리였으므로 이 레이스에서 독일군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어 보엿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압도적인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로스토프를 지켜냈고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 많은 병력이 묶여 있었고 6군이 계속 저항한 탓도 있다.) 2월 1일 클라이스트가 로스토프에 도착함으로 A집단군은 사지를 벗어났다.
그러나 6군의 종말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극소량의 공중보급이나마 악천후로 1월 24일 이후로는 줄어들었다.병사들은 군마까지 잡아먹어가며 버텼으나 매일 굶어죽는 병사가 나오는 실정이었다.
소련군의 항복권유가 있었으나 히틀러는 이를 금지했고 파울루스를 원수로 임명했다.
그의 바라는 바는 하나-독일군역사상 원수중에 적에게 항복해 포로가 된 사람은 없다.즉 파울루스가 자결하거나 전사하여 명예를 지키라는 암시였다.
덩달아 장교들도 진급했고 이게 죽어가는 그들에게 히틀러가 내린 선물이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기대를 저버리고 1월 31일 항복했고 2월 2일까지 스탈린 그라드의 전독일군이 항복하거나 소탕당했다.포로의 숫자는 9만명이었고 이중태반은 시베리아로 이동중이나 수용소에서 죽어가 살아서 고국땅을 밟은 이는 6000명에 불과했다.(파울루스도 살아서 돌아갔고 그는 수용소가 아니라 비교적 편한 곳에서 안락하게 (병사들보다)지냈다고 한다.)
스탈린그라드의 병력 손실에는 논란이 많지만 비교적 독일군 30만여몀의 손실은 인정되고 있는 편이며 추축국이 70만,소련군이 비슷하거나 약간 더 많은 (하지만 워낙 설이 많아 여기 다적지 않겟습니다.)정도로 짐작된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항복에 대해 길길이 날뛰었지만 전장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스탈린그라드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괴링은 공수보급에 대한 부적절한 보고로 일부의 책임이 있지만 그는 내가 임명한 사람이므로 그가 책임을 질수는 없다."
스탈린그라드는 여러모로 2차대전의 한 전환점이었다.
비록 그 다음의 하르코프전투에서 만슈타인이 어느정도의 성과를 거두지만 결국 그해에 히틀러가 세운 전략목표는 좌절로 돌아갔고 뭣보다 그시점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의 손실은 제대로 만회할 생산력이 부족했다.또한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있었다.
아프리카의 엘알람메인과 함께 스탈린그라드는 연합군 반격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참고자료:도해세계전사
20세기결전30장면 ,알기쉬운 2차세계대전사,그외 인터넷자료(디펜스코리아)
2001년 11월10일 돌하루방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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