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boot war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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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한 잠수함전의 시작
U보트는 전투함으로서 적의 전함이나 구축함 같은 전투함을 공격하여 격침시키는 것이 주임무라고 할수 있지만 2차대전의 독일군 U보트에 대해서 수상함정과의 전투보다 더욱 중요한것은 상선을 격침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은 섬나라로서 본질적으로 식량을 자급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이때문에 캐나다나 미국등지에서 빵의 원료인 소맥을 수입해야 하고 아르헨티나등 남미로부터는 육류를 수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호주로부터는 양모를, 인도로부터는 면과 차를, 아프리카로부터는 광물과 커피등을 들여와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국은 세계 각지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원료들을 가져다 쓰지 않으면 국민들의 생활은 마비되고 만다.
독일군이 노린것은 영국으로 향하는 수송루트를 차단하여 영국의 젖줄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수상함정과 협력하여 적의 전함이나 순양함들을 격침시킨다는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1만톤급의 순양함을 격침시키는것보다 5천톤의 상선을 격침시키는것이 우선시되었다. 적 수상함과의 전투는 불가피할 경우에만 한정되었다.
1936년 런던 협정에 따르면 상선에 대해 U보트는 일단 부상해서 상선을 정지시키고 적재물자와 항해일지등을 조사한뒤 그 함선이 전쟁용 물자등 금지된 물품을 운반중이면 승무원을 퇴거시켜 U보트에 수용한뒤 그 상선을 격침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선박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상선이 정지명령을 듣지 않거나 그 선박이 군용 선박인 경우에만 한정되었다. 하지만 개전후 아데니아호 격침사건이 일어난뒤 9월 23일에 히틀러가 정지시킨 함선이 무선을 사용하는 경우 무조건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어서 등화관제를 하고있는 함선은 격침시켜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고, 10월 17일에는 여객선을 제외하고 수상한 함정은 모두 격침시켜도 좋다는 허가를 내리게 된다. 이때부터 독일군은 무제한 잠수함전을 시작한 것이다.
*사지를 벗어난 U48
객선 아데니아호의 격침과 공식전과 1호인 영국의 항모 케리어져스의 격침. 그리고 스카퍼플로우에서의 영국전함 로열 오크 격침시킨 이 시기에도 이미 U보트의 출격은 시작되고 있었다. 총 56척의 U보트 가운데 가동상태의 23척 전부가 출격하여 영국으로 향하는 수송루트의 상선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수많은 U보트 에이스들 가운데 처음으로 100000t을 돌파한 에이스는 바로 U48의 '허버트 슐체'였다. 슐체는 1909년 7월 24일 생으로 1930년에 독일 해군에 입대했고 1939년 4월부터 U48의 함장이 되었다.
개전 초기 슐체의 U48은 호위구축함을 수반하는 상선을 공격하여 2척가운데 1척을 격침시켰다. 곧바로 호위 구축함의 반격이 시작되었지남 U48은 급속잠항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이어서 30분뒤 U48은 다시 부상하여 2척의 수송선을 발견했다. 슐체의 명령으로 다시 잠항항려 할때 영국 비행정 '선더랜드' 가 다가오는것이 보였다. 슐체는 재차 급속잠항을 명령했지만 제대로 잠수하기도 전에 선더랜드로부터 폭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4회의 폭발음이 승무원들의 귀를 찟는듯 했지만 다행히도 U48은 피해를 면할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영국의 구축함이 다가왔다. 아즈딕의 '피잉'하는 음파가 들려왔고 이어서 다시 폭뢰가 투하되었다. 주위에는 2발의 폭뢰가 작열하는 가운에 U48은 천천히 전진하여 다시금 사지를 벗어나는듯 했지만 곧 3번째의 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발은 U48의 아주 가까운곳에서 일어나 침도계와 통신장치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계속되는 공격으로 슐체는 U보트를 아예 바다 밑바닥에 정지시킬 결심을 했다. U48은 바다밑에 정지한뒤 모든 동력을 껐다. 그러나 영국 구축함은 계속 U보트를 찾고 있었다. U보트 승무원들의 귀에 엔진음이 들렸고 다시금 여러발의 폭뢰가 작열했다. U48의 선체는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고 내부의 각종 기물들이 파손되었짐ㄴ U보트의 내압선체는 그런대로 폭뢰공격을 견디어 냈다.
한참뒤 주위가 잠잠해지자 U48은 심도 60m까지 부상했지만 이번에도 안전해역은 아니었다. 무려 24척의 호위함이 U보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슐체는 소리가 크게나는 디젤엔진을 끄고 전동기만을 이용해서 서서히 전진했고 방향타도 전동에서 수동으로 변경시켜 항해했다. 결국 U48은 안전지역으로 탈출할수 있었다.
이러한 일은 다만 슐체만이 아닌 대부분의 U보트에 있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지만 U보트 승무원들은 이러한 고난 가운데서 눈부신 전과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노르웨이 작전과 어뢰의 결함
1939년 9월 U보트 부대가 올린 전과는 41척 153000t이었으며 10월에는 27척 135000t, 11월은 21척 52000t, 12월은 25척 81000t이었다.
이처럼 매월 전과가 떨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개전과 함께 가동 U보트가 모두 출동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뢰와 식량이 떨어져 귀환했기 때문이다. 되니츠가 처음 생각했던 전체의 1/3의 U보트를 상선공격을 위해 상시 대기시킨다는 것은 꿈에 불과할 정도로 U보트는 부족했다. U보트들이 다시금 보급을 받고 출격한 1940년 1월에는 40척 111000t, 2월에는 45척 170000t으로 증가했지만 3월 4일에 독일군의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작전이 있어서 상륙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U보트를 전용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U보트들의 상선공격은 다시 주춤하게 된다.
노르웨이 작전을 위해서 되니츠는 내키지 않지만 훈련용 U보트까지 모두 소집하여 31척의 U보트를 노르웨이 작전에 투입했다. 하지만 여기서 되니츠의 U보트 부대는 생각지도 않은 고초를 격게 되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새로 보급되기 시작한 자기발화식 어뢰의 문제였다.
당초 독일해군의 어뢰는 적함에 명중하게되면 어뢰가 폭발하는 격발신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원거리에서 어뢰를 발사하여 적함에 정확히 맞춘다는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고 선체의 밑바닥에서 어뢰가 폭발하는것이 적함에 주는 피해도 크기 때문에 자기발화식 신관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선체의 자성을 감지하면 어뢰가 폭발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서 노르웨이작전에서 이 자기발화식 어뢰가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스카퍼플로우의 영웅 권터 프린도 계속적인 어뢰의 불발로 결국 더이상의 공격을 포기해야 했으며 이것은 다른 U보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노르웨이작전에서는 어뢰의 결함을 노출시킨채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고 1940년 6월부터는 잠정적으로 자기발화식어뢰는 더 이상 보급되지 않게 된다. 한편 상선격침건과도 급격히 하락하여 1940년 3월에는 23척 80000t, 4월에는 7척 40000t, 5월에는 13척 65000t에 머물게 된다.
한편, 상선을 격침시키는데 1발로 침몰시키는 경우는 전체의 40%에 불과했고 대부분 2발이상의 어뢰를 명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한 전체의 20%이상은 침몰시키는데 4발의 어뢰를 명중시켜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어뢰의 소비가 많아지게 되고 상대적으로 불발탄이 많아 격침전과도 자연히 격감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U보트의 황금기
1940년 5월 프랑스가 항복함에 따라 U보트 부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 하였다. 즉 대서양을 무대로 활동하는 U보트 부대에 프랑스 비스케만의 로리안, 산나제르, 브레스트, 라팔리스등 U보트 기지로 사용할수 있는 항구가 제공됨으로서 U보트는 더욱 빠른 시간안에 대서양으로 출격하고 재보급도 원활하게 이루어 질수 있기 때문이었다. 1회 출격에 단축되는 길이는 무려 800km. U보트는 거의 대서양 전역으로 진출할수가 있었다.
당시 영국해군의 호위선단은 미국으로 향할때 서경 15도까지만 호위하고 거기서 미국으로부터 돌아오는 선단을 호위하면서 귀환하는 방식을 취했짐나 독일군 U보트의 활동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호위거리는 더욱 길어져야 했다. 하지만 호위함이 충분치 않은 영국해군으로서는 때때로 호위선단이 없는 채로 상선을 출항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되니츠는 이제 자신의 이리떼 전술을 실행에 옳길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야간 수상공격전술을 구사하도록 하였다. 수중이라면 모르시만 수상에서는 음파탐지기인 아즈딕의 효과가 없고 만일 야간에 호위함이 U보트를 발견한다 해도 호위함들은 보통 성능이 떨어지는 낡은 선박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U보트가 디젤엔진을 이용해 전속주행한다면 충분히 따돌릴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또한 U보트함교는 상대적으로 적 수상함정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특히 야간에는 발견하기가 더 어려웠다. 이런점을 이요해서 적 선단의 한가운데로 돌입하여 전투를 벌이는 용맹한 U보트들도 많았다. 그리고 U보트의 이리떼 전술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는 팀웍을 재고시키기위해 되니츠는 U보트 부대 정보실을 설치하여 각 U보트들의 위치를 파악하면서 효과적인 집단전술을 구사할수 있도록 하였다.
1940년 6월에는 58척 284000t의 전과를 올리게 된다. 7월에는 38척 196000t의 전과를 기록했고, 8월 17일에는 히틀러가 U보트 함장들의 행동을 쉽게 하기 위해 영국주변에 대한 봉쇄를 단행하고 중립국 선박이라도 발견 즉시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으로 더욱 신이 난 U보트 부대는 1940년 8월에는 56척 268000t, 9월에는 59척 295000t, 10월에는 무려 63척 352000t의 전과를 올렸다. 특히 U47의 권터프린은 10월에 재출격하여 동료 U보트 5척과 협력하여 21척을 격침시켰으며, U보트 함장으로서는 최초로 백엽기사 철십자장을 수상함과 함께 U보트 부대 최고의 에이스가 되었다.
U보트들의 귀환으로 11월에는 32척 147000t, 12월에는 37척 213000t으로 격침전과가 약간 떨어지기는 했지만 1940년 후반기는 U보트 부대로서는 최고의 황금기였다. 당시 투입된 U보트는 57척이었으며 손실은 겨우 6척에 불과했다. 그리고 1940년의 이런 전과는 집단전술의 유효성을 입증한것이기도 하였으며 만약 되니츠가 애초 주장한 300척의 U보트가 완전히 준비되어 상시 100척의 U보트가 공격에 동원되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변할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2002년 02월20일 제ss기갑사단장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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