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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oot war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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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사 게시판은 부운영자이신 메일박스님이 관리를 해주십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실분은<BR>다음 원칙을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BR>1.제목은 이용자들이 검색시 찾기쉽게 명확히 한다.<BR>2.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은 제외하고 반드시 출처를 밝힌다.*신장비를 개발하는 영국 

보급이 바닥난 U보트의 귀환으로 11월부터 격침전과가 줄어들기 시작한것과 아울러 U보트 부대에는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기 시작했다. 우선 이 시기는 기상조건이 악화되어 허리케인이 심하게 불어 소형함인 U보트는 거센 파도속에서 제대로 항해할수 없었다. 두번째는 이 시기가 독일군의 영국본토침공이 거의 무산될 시기였으므로 영국해군이 본토방어를 위해 남겨두었던 호위함들을 선단호위에 투입할수가 있었던 점이다. 

여기에 처칠수상의 끈질긴 노력으로 미국으로부터 중고 구축함 50척을 공여받아 1940년말부터 선단호위에 투입하였고 선더랜드 비행정의 초계비행도 크게 강화되었다. 특히 대U보트 작전을 위한 항공전력의 증강은 크나큰 위협이었다. 게다가 영국군은 12월 4일자로 영국연안항공대를 해군에 편입시켜 대U보트 작전을 원하하게 하도록 했다. 반면 독일군의 경우에는 공군의 지원을 받아 적선단을 먼저 발견하고 U보트부대를 유도할 필요가 있었지만 공군과 해군의 계속적인 알력으로 항공지원을 받는다는것은 꿈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U보트 부대가 배속받은 항공기는 겨우 Fw200 콘돌 1개 비행대뿐이었다. 이것도 처음에는 괴링이 모르는 가운데 배속되었다가 괴링이 이를 알고 다시 원상복귀시키려 하자 되니츠가 괴링과 싸우다시피해서 얻어낸것이었다. 

*대U보트 장비의 발달 

U보트에 대해 또 하나 위협이 된 장비가 등장했으니 그것은 무선방위측정장치였다. 이 장치는 육상 또는 항해중인 선박에 장비된 수신기를 이용해 U보트가 발신하는 전파를 포착하여 U보트의 위치를 판단하는 장치였다. 이 장치는 U보트의 위치를 포착할뿐만 아니라 U보트로 하여금 무전을 통제하도록 강요함으로서 U보트들이 집단전술을 구사할수 없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또한 영국군은 U보트의 발신장치를 역이용하여 완전히 활용할수 있도록 하기위해 되니츠의 U보트 정보실에 해당하는 잠수함 탐지실을 런던의 해군성에 설치했다. 여기서는 아주 사소한 정보까지 수집하여 기록함으로서 항시 대U보트작전에 있어서 최신정보를 유지할수 있었다. 이것은 대단한 효과가 있어서 만일 수송선단이 U보트를 만날위험지역에 진입하려하면 즉각 경고를 보내 피할수 있도록 할수 있었다. 

또 한가지 영국군은 중요한 장비를 함정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레이더로서 초기의 원시적인 형태보다 훨씬 소형에 조작도 간편한것을 개발하여 호위함정과 대잠초계기에 장비시켰다. 이 레이더를 이용함으로써 야간에도 수상의 U보트를 수색할수 있게 되었으며 아즈딕이 수상함에는 효과가 없었던것을 완전히 보완할수가 있었다. 또한 야간집단공격을 장기로 하는 U보트부대가 야간에 수면위로 부상하는것이 포착되므로 U보트부대의 수면부상공격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국은 항공전에서도 그랬지만 현대전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좋은 전파병기의 개발에 있어서 항시 독일에 앞서고 있었다. 독일은 이미 1935년경 극초단파 레이더를 개발했지만 당시 독일의 과학자들은 레이더의 장래성에 의심을 품고 그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그러는 동안 영국은 레이더를 비롯한 전파병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해 장거리 초계기에도 레이더를 장비함으로서 U보트 수색능력은 비약적인 향상을 보이고 있었다. 

*권터 프린의 최후 

1941년 1월의 격침전과는 21척 127000t, 2월은 37척 197000t 으로 그런대로 나쁜편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용맹한 U보트 함장들의 분투에 의한것으로서 실제 상황은 점차 나빠져 갔다. 그리고 1941년 초에는 3명의 격침왕을 잃는 액운이 발생했다. 

우선 U47의 권터프린은 스카퍼플로우작전뒤 휴식을 취하고 1941년 2월 20일 로리안 군항을 출발하여 스코틀랜드의 불방해역에서 U보트 부대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이 출격에는 또다른 U보트 영웅인 U99의 오토크레치머가 있었고 역시 U보트 최고의 에이스인 요아힘 셰프케의 U100도 같은 장소를 향하고 있었다. 출격 이틀후 적 선단을 발견하고 서서히 추격하던 프린은 잠시 선단을 놓치기도 했지만 5시간후 다시 그들을 발견하여 호위함의 폭뢰공격을 피해가며 공격을 감행, 22000t의 전과를 올렸다. 

1941년 3월 6일에는 아프리카로 향하는 영국의 OB293선단을 발견했다.프린은 주변의 동료들을 불러들인뒤 밤이 되기를 기다려 특유의 야간 집단전술을 구사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U보트 부대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2척의 수송선이 격침되고 2척이 격파되었다. 하지만 영국군도 이제는 대잠장비를 충실하게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무선방위측정장치를 이용해 U보트의 위치를 파악한 호위구축함들은 즉각 폭뢰세례를 퍼부어 U70을 비롯한 2척의 U보트가 격침되고 만다. 그리고 프린의 U47과 오토 크레치머의 U99도 급히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U47은 다시금 수송선단을 공격하기위해 추적을 시작했다. 3월 7일 오전 4시 24분 프린은 사령부에 수송선단의 위치를 타전했다. 이것이 영국군에게 다시금 포착되어 U47은 호위함들의 추적을 받게되었고 아주 나빴던 기상상태가 갑자기 좋아지면서 수면위로 부상해있던 U47은 영국 구축함 울버린의 시야에 들게 되었다. 

U47은 급속잠항을 시도했으나 울버린은 때를 놓치지 않고 폭뢰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U47의 추진기가 파괴되어 잠수함으로서는 치명적인 소음이 발생하여 U47은 음파탐지기에 포착되고 만다. 울버린은 U47에 다시 폭뢰공격을 가해 결국 U47은 격침되고 만다. 스카퍼플로우의 영웅 권터프린은 이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았고 U47의 승무원 전원도 프린과 운명을 함께 했다. 

권터 프린의 죽음은 독일 U보트부대 전체에 큰 충격이었으며 특히 그를 아들처럼 아끼던 되니츠의 슬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였다. 더우기 독일국민 전체의 영웅이라고 할수 있는 프린의 죽음이 국민들에게 미칠 충격을 염려하여 독일군 사령부에서는 권터 프린의 전사를 5월까지 발표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프린이 마지막으로 수송선단의 위치를 타전한 3월 7일 오전 4시 24분이후 U47의 연락이 완전히 단절되었고 독일군이 혹시나 하고 U47의 귀환을 기다려 보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U47이 격침되는 과정이 상세히 알려진 것은 전쟁이 끝난후 1946년 간행된 영국정부의 문서에 의해서였다. 

U47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되니츠도 프린의 전사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때 전해군장병들에게 발령한 통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스카퍼플로우의 영웅에게 이번출격은 마지막 출격이 되었다. 우리들은 프린과 그의 부하들에게 충심으로 조의를 표한다. 그들이 영국해군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우리의 부동의 신념의 상징이며 우리들도 이러한 신념을 견지하면서 싸워야 할것이다." 

*3명의 격침왕을 잃다. 

권터 프린의 전사에 이어 3월 17일에는 U100의 함장인 '요아힘 셰프케'와 U99의 함장 '오토 크레치머'를 잃게 됨으로서 U보트 부대는 3월 한달동안 최고의 U보트 전사 3명을 잃는 결과가 되었다. 

요아힘 셰프케는 U3과 U19를 거쳐 1940년 5월 30일부터 U100의 함장이 되었다. 그는 그때까지 대서양과 북해방면에서 14회의 작전항해를 실시햐였으며 1940년 7월 1일에는 그간의 전과와 모범적인 인품으로 7번째로 백엽 기사철십자장을 수상하였다. 

U99의 오토 크래치머는 그때까지뿐 아니라 대전 전기간을 통철어도 1위의 격침전과를 올린 최고의 U보트 에이스로서 1936년 12월 1일부터는 U35에 탑승하여 스페인 내란의 지원임무에 나서기도 하였다. 1937년 10월 1일에는 U23의 함장이 되었으며 1940년 4월 18일 U99의 함장이 되었다. 

크레치머는 비스케만 해역을 필두로 16회의 작전항해에 나서 냉철한 판단력과 직감으로 꾸준히 격침전과를 올렸으며 때로는 미리 영국군 수송선에 자신들의 존재를 통고하고 격침시키는 기사도정신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U보트 부대의 슈퍼 에이스 2명은 1941년 3월 16일 일몰직전 아일랜드의 HX112고속수송선단을 포착, 공격준비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우수한 대잠탐지장비로 무장한 영국군은 U99와 U100을 이미 포착하여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공격은 먼저 셰프케의 U100에 가해졌다. 하지만 타고난 전사인 이들도 뒤질새라 U99의 크레치머는 U100이 공격받는틈을 타서재빨리 수송선단에 어뢰공격을 감행하여 순식간에 5척을 격침시켰다. 

한순간에 5척을 잃고 호위함이 수송함의 승무원들을 구조하기위해 분주한 사이 U100은 역으로 다시 공격을 감행하려 했다. 그러나 우수한 전파병기로 무장한 영국구축함에 다시 포착되어 3월 17일 오전 3시경 폭뢰공격을 받아 기관부가 대파되어 수면위로 부상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맥킨타이어'대령이 지휘하는 영국구축함 '바노크'는 코앞에 부상한 U100에 선체를 직접 돌입시켜 U100을 격파했다. 함장인 셰프케를 비롯한 승무원 전원이 전사했다. 

그로부터 30분후에는 크레치머의 U99도 격침되고 마는데, U99는 영국해군의 장거리 호위함 '워커'와 충돌하여 격침되었다. 운좋게도 크레치머는 영국군에게 구조되어 포로가 된다. 

한편 포로가된 크레치머는 캐나다의 온타리오 호반에 있는 보먼빌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여기서 그는 포로 대표를 맡았다. 그는 여기서 탈주계획을 세우고 독일본국과 연락하여 U보트에 의해 자신들을 구출하는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여의치 못했고 결국 석방된것은 1947년 12월 31일이었다. 석방후에는 재건 서독국방군에서 근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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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이 바닥난 U보트의 귀환으로 11월부터 격침전과가 줄어들기 시작한것과 아울러 U보트 부대에는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기 시작했다. 우선 이 시기는 기상조건이 악화되어 허리케인이 심하게 불어 소형함인 U보트는 거센 파도속에서 제대로 항해할수 없었다. 두번째는 이 시기가 독일군의 영국본토침공이 거의 무산될 시기였으므로 영국해군이 본토방어를 위해 남겨두었던 호위함들을 선단호위에 투입할수가 있었던 점이다. 

여기에 처칠수상의 끈질긴 노력으로 미국으로부터 중고 구축함 50척을 공여받아 1940년말부터 선단호위에 투입하였고 선더랜드 비행정의 초계비행도 크게 강화되었다. 특히 대U보트 작전을 위한 항공전력의 증강은 크나큰 위협이었다. 게다가 영국군은 12월 4일자로 영국연안항공대를 해군에 편입시켜 대U보트 작전을 원하하게 하도록 했다. 반면 독일군의 경우에는 공군의 지원을 받아 적선단을 먼저 발견하고 U보트부대를 유도할 필요가 있었지만 공군과 해군의 계속적인 알력으로 항공지원을 받는다는것은 꿈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U보트 부대가 배속받은 항공기는 겨우 Fw200 콘돌 1개 비행대뿐이었다. 이것도 처음에는 괴링이 모르는 가운데 배속되었다가 괴링이 이를 알고 다시 원상복귀시키려 하자 되니츠가 괴링과 싸우다시피해서 얻어낸것이었다. 

*대U보트 장비의 발달 

U보트에 대해 또 하나 위협이 된 장비가 등장했으니 그것은 무선방위측정장치였다. 이 장치는 육상 또는 항해중인 선박에 장비된 수신기를 이용해 U보트가 발신하는 전파를 포착하여 U보트의 위치를 판단하는 장치였다. 이 장치는 U보트의 위치를 포착할뿐만 아니라 U보트로 하여금 무전을 통제하도록 강요함으로서 U보트들이 집단전술을 구사할수 없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또한 영국군은 U보트의 발신장치를 역이용하여 완전히 활용할수 있도록 하기위해 되니츠의 U보트 정보실에 해당하는 잠수함 탐지실을 런던의 해군성에 설치했다. 여기서는 아주 사소한 정보까지 수집하여 기록함으로서 항시 대U보트작전에 있어서 최신정보를 유지할수 있었다. 이것은 대단한 효과가 있어서 만일 수송선단이 U보트를 만날위험지역에 진입하려하면 즉각 경고를 보내 피할수 있도록 할수 있었다. 

또 한가지 영국군은 중요한 장비를 함정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레이더로서 초기의 원시적인 형태보다 훨씬 소형에 조작도 간편한것을 개발하여 호위함정과 대잠초계기에 장비시켰다. 이 레이더를 이용함으로써 야간에도 수상의 U보트를 수색할수 있게 되었으며 아즈딕이 수상함에는 효과가 없었던것을 완전히 보완할수가 있었다. 또한 야간집단공격을 장기로 하는 U보트부대가 야간에 수면위로 부상하는것이 포착되므로 U보트부대의 수면부상공격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국은 항공전에서도 그랬지만 현대전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좋은 전파병기의 개발에 있어서 항시 독일에 앞서고 있었다. 독일은 이미 1935년경 극초단파 레이더를 개발했지만 당시 독일의 과학자들은 레이더의 장래성에 의심을 품고 그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그러는 동안 영국은 레이더를 비롯한 전파병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해 장거리 초계기에도 레이더를 장비함으로서 U보트 수색능력은 비약적인 향상을 보이고 있었다. 

*권터 프린의 최후 

1941년 1월의 격침전과는 21척 127000t, 2월은 37척 197000t 으로 그런대로 나쁜편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용맹한 U보트 함장들의 분투에 의한것으로서 실제 상황은 점차 나빠져 갔다. 그리고 1941년 초에는 3명의 격침왕을 잃는 액운이 발생했다. 

우선 U47의 권터프린은 스카퍼플로우작전뒤 휴식을 취하고 1941년 2월 20일 로리안 군항을 출발하여 스코틀랜드의 불방해역에서 U보트 부대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이 출격에는 또다른 U보트 영웅인 U99의 오토크레치머가 있었고 역시 U보트 최고의 에이스인 요아힘 셰프케의 U100도 같은 장소를 향하고 있었다. 출격 이틀후 적 선단을 발견하고 서서히 추격하던 프린은 잠시 선단을 놓치기도 했지만 5시간후 다시 그들을 발견하여 호위함의 폭뢰공격을 피해가며 공격을 감행, 22000t의 전과를 올렸다. 

1941년 3월 6일에는 아프리카로 향하는 영국의 OB293선단을 발견했다.프린은 주변의 동료들을 불러들인뒤 밤이 되기를 기다려 특유의 야간 집단전술을 구사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U보트 부대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2척의 수송선이 격침되고 2척이 격파되었다. 하지만 영국군도 이제는 대잠장비를 충실하게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무선방위측정장치를 이용해 U보트의 위치를 파악한 호위구축함들은 즉각 폭뢰세례를 퍼부어 U70을 비롯한 2척의 U보트가 격침되고 만다. 그리고 프린의 U47과 오토 크레치머의 U99도 급히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U47은 다시금 수송선단을 공격하기위해 추적을 시작했다. 3월 7일 오전 4시 24분 프린은 사령부에 수송선단의 위치를 타전했다. 이것이 영국군에게 다시금 포착되어 U47은 호위함들의 추적을 받게되었고 아주 나빴던 기상상태가 갑자기 좋아지면서 수면위로 부상해있던 U47은 영국 구축함 울버린의 시야에 들게 되었다. 

U47은 급속잠항을 시도했으나 울버린은 때를 놓치지 않고 폭뢰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U47의 추진기가 파괴되어 잠수함으로서는 치명적인 소음이 발생하여 U47은 음파탐지기에 포착되고 만다. 울버린은 U47에 다시 폭뢰공격을 가해 결국 U47은 격침되고 만다. 스카퍼플로우의 영웅 권터프린은 이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았고 U47의 승무원 전원도 프린과 운명을 함께 했다. 

권터 프린의 죽음은 독일 U보트부대 전체에 큰 충격이었으며 특히 그를 아들처럼 아끼던 되니츠의 슬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였다. 더우기 독일국민 전체의 영웅이라고 할수 있는 프린의 죽음이 국민들에게 미칠 충격을 염려하여 독일군 사령부에서는 권터 프린의 전사를 5월까지 발표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프린이 마지막으로 수송선단의 위치를 타전한 3월 7일 오전 4시 24분이후 U47의 연락이 완전히 단절되었고 독일군이 혹시나 하고 U47의 귀환을 기다려 보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U47이 격침되는 과정이 상세히 알려진 것은 전쟁이 끝난후 1946년 간행된 영국정부의 문서에 의해서였다. 

U47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되니츠도 프린의 전사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때 전해군장병들에게 발령한 통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스카퍼플로우의 영웅에게 이번출격은 마지막 출격이 되었다. 우리들은 프린과 그의 부하들에게 충심으로 조의를 표한다. 그들이 영국해군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우리의 부동의 신념의 상징이며 우리들도 이러한 신념을 견지하면서 싸워야 할것이다." 

*3명의 격침왕을 잃다. 

권터 프린의 전사에 이어 3월 17일에는 U100의 함장인 '요아힘 셰프케'와 U99의 함장 '오토 크레치머'를 잃게 됨으로서 U보트 부대는 3월 한달동안 최고의 U보트 전사 3명을 잃는 결과가 되었다. 

요아힘 셰프케는 U3과 U19를 거쳐 1940년 5월 30일부터 U100의 함장이 되었다. 그는 그때까지 대서양과 북해방면에서 14회의 작전항해를 실시햐였으며 1940년 7월 1일에는 그간의 전과와 모범적인 인품으로 7번째로 백엽 기사철십자장을 수상하였다. 

U99의 오토 크래치머는 그때까지뿐 아니라 대전 전기간을 통철어도 1위의 격침전과를 올린 최고의 U보트 에이스로서 1936년 12월 1일부터는 U35에 탑승하여 스페인 내란의 지원임무에 나서기도 하였다. 1937년 10월 1일에는 U23의 함장이 되었으며 1940년 4월 18일 U99의 함장이 되었다. 

크레치머는 비스케만 해역을 필두로 16회의 작전항해에 나서 냉철한 판단력과 직감으로 꾸준히 격침전과를 올렸으며 때로는 미리 영국군 수송선에 자신들의 존재를 통고하고 격침시키는 기사도정신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U보트 부대의 슈퍼 에이스 2명은 1941년 3월 16일 일몰직전 아일랜드의 HX112고속수송선단을 포착, 공격준비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우수한 대잠탐지장비로 무장한 영국군은 U99와 U100을 이미 포착하여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공격은 먼저 셰프케의 U100에 가해졌다. 하지만 타고난 전사인 이들도 뒤질새라 U99의 크레치머는 U100이 공격받는틈을 타서재빨리 수송선단에 어뢰공격을 감행하여 순식간에 5척을 격침시켰다. 

한순간에 5척을 잃고 호위함이 수송함의 승무원들을 구조하기위해 분주한 사이 U100은 역으로 다시 공격을 감행하려 했다. 그러나 우수한 전파병기로 무장한 영국구축함에 다시 포착되어 3월 17일 오전 3시경 폭뢰공격을 받아 기관부가 대파되어 수면위로 부상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맥킨타이어'대령이 지휘하는 영국구축함 '바노크'는 코앞에 부상한 U100에 선체를 직접 돌입시켜 U100을 격파했다. 함장인 셰프케를 비롯한 승무원 전원이 전사했다. 

그로부터 30분후에는 크레치머의 U99도 격침되고 마는데, U99는 영국해군의 장거리 호위함 '워커'와 충돌하여 격침되었다. 운좋게도 크레치머는 영국군에게 구조되어 포로가 된다. 

한편 포로가된 크레치머는 캐나다의 온타리오 호반에 있는 보먼빌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여기서 그는 포로 대표를 맡았다. 그는 여기서 탈주계획을 세우고 독일본국과 연락하여 U보트에 의해 자신들을 구출하는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여의치 못했고 결국 석방된것은 1947년 12월 31일이었다. 석방후에는 재건 서독국방군에서 근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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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이 바닥난 U보트의 귀환으로 11월부터 격침전과가 줄어들기 시작한것과 아울러 U보트 부대에는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기 시작했다. 우선 이 시기는 기상조건이 악화되어 허리케인이 심하게 불어 소형함인 U보트는 거센 파도속에서 제대로 항해할수 없었다. 두번째는 이 시기가 독일군의 영국본토침공이 거의 무산될 시기였으므로 영국해군이 본토방어를 위해 남겨두었던 호위함들을 선단호위에 투입할수가 있었던 점이다. 

여기에 처칠수상의 끈질긴 노력으로 미국으로부터 중고 구축함 50척을 공여받아 1940년말부터 선단호위에 투입하였고 선더랜드 비행정의 초계비행도 크게 강화되었다. 특히 대U보트 작전을 위한 항공전력의 증강은 크나큰 위협이었다. 게다가 영국군은 12월 4일자로 영국연안항공대를 해군에 편입시켜 대U보트 작전을 원하하게 하도록 했다. 반면 독일군의 경우에는 공군의 지원을 받아 적선단을 먼저 발견하고 U보트부대를 유도할 필요가 있었지만 공군과 해군의 계속적인 알력으로 항공지원을 받는다는것은 꿈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U보트 부대가 배속받은 항공기는 겨우 Fw200 콘돌 1개 비행대뿐이었다. 이것도 처음에는 괴링이 모르는 가운데 배속되었다가 괴링이 이를 알고 다시 원상복귀시키려 하자 되니츠가 괴링과 싸우다시피해서 얻어낸것이었다. 

*대U보트 장비의 발달 

U보트에 대해 또 하나 위협이 된 장비가 등장했으니 그것은 무선방위측정장치였다. 이 장치는 육상 또는 항해중인 선박에 장비된 수신기를 이용해 U보트가 발신하는 전파를 포착하여 U보트의 위치를 판단하는 장치였다. 이 장치는 U보트의 위치를 포착할뿐만 아니라 U보트로 하여금 무전을 통제하도록 강요함으로서 U보트들이 집단전술을 구사할수 없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또한 영국군은 U보트의 발신장치를 역이용하여 완전히 활용할수 있도록 하기위해 되니츠의 U보트 정보실에 해당하는 잠수함 탐지실을 런던의 해군성에 설치했다. 여기서는 아주 사소한 정보까지 수집하여 기록함으로서 항시 대U보트작전에 있어서 최신정보를 유지할수 있었다. 이것은 대단한 효과가 있어서 만일 수송선단이 U보트를 만날위험지역에 진입하려하면 즉각 경고를 보내 피할수 있도록 할수 있었다. 

또 한가지 영국군은 중요한 장비를 함정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레이더로서 초기의 원시적인 형태보다 훨씬 소형에 조작도 간편한것을 개발하여 호위함정과 대잠초계기에 장비시켰다. 이 레이더를 이용함으로써 야간에도 수상의 U보트를 수색할수 있게 되었으며 아즈딕이 수상함에는 효과가 없었던것을 완전히 보완할수가 있었다. 또한 야간집단공격을 장기로 하는 U보트부대가 야간에 수면위로 부상하는것이 포착되므로 U보트부대의 수면부상공격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국은 항공전에서도 그랬지만 현대전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좋은 전파병기의 개발에 있어서 항시 독일에 앞서고 있었다. 독일은 이미 1935년경 극초단파 레이더를 개발했지만 당시 독일의 과학자들은 레이더의 장래성에 의심을 품고 그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그러는 동안 영국은 레이더를 비롯한 전파병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해 장거리 초계기에도 레이더를 장비함으로서 U보트 수색능력은 비약적인 향상을 보이고 있었다. 

*권터 프린의 최후 

1941년 1월의 격침전과는 21척 127000t, 2월은 37척 197000t 으로 그런대로 나쁜편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용맹한 U보트 함장들의 분투에 의한것으로서 실제 상황은 점차 나빠져 갔다. 그리고 1941년 초에는 3명의 격침왕을 잃는 액운이 발생했다. 

우선 U47의 권터프린은 스카퍼플로우작전뒤 휴식을 취하고 1941년 2월 20일 로리안 군항을 출발하여 스코틀랜드의 불방해역에서 U보트 부대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이 출격에는 또다른 U보트 영웅인 U99의 오토크레치머가 있었고 역시 U보트 최고의 에이스인 요아힘 셰프케의 U100도 같은 장소를 향하고 있었다. 출격 이틀후 적 선단을 발견하고 서서히 추격하던 프린은 잠시 선단을 놓치기도 했지만 5시간후 다시 그들을 발견하여 호위함의 폭뢰공격을 피해가며 공격을 감행, 22000t의 전과를 올렸다. 

1941년 3월 6일에는 아프리카로 향하는 영국의 OB293선단을 발견했다.프린은 주변의 동료들을 불러들인뒤 밤이 되기를 기다려 특유의 야간 집단전술을 구사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U보트 부대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2척의 수송선이 격침되고 2척이 격파되었다. 하지만 영국군도 이제는 대잠장비를 충실하게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무선방위측정장치를 이용해 U보트의 위치를 파악한 호위구축함들은 즉각 폭뢰세례를 퍼부어 U70을 비롯한 2척의 U보트가 격침되고 만다. 그리고 프린의 U47과 오토 크레치머의 U99도 급히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U47은 다시금 수송선단을 공격하기위해 추적을 시작했다. 3월 7일 오전 4시 24분 프린은 사령부에 수송선단의 위치를 타전했다. 이것이 영국군에게 다시금 포착되어 U47은 호위함들의 추적을 받게되었고 아주 나빴던 기상상태가 갑자기 좋아지면서 수면위로 부상해있던 U47은 영국 구축함 울버린의 시야에 들게 되었다. 

U47은 급속잠항을 시도했으나 울버린은 때를 놓치지 않고 폭뢰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U47의 추진기가 파괴되어 잠수함으로서는 치명적인 소음이 발생하여 U47은 음파탐지기에 포착되고 만다. 울버린은 U47에 다시 폭뢰공격을 가해 결국 U47은 격침되고 만다. 스카퍼플로우의 영웅 권터프린은 이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았고 U47의 승무원 전원도 프린과 운명을 함께 했다. 

권터 프린의 죽음은 독일 U보트부대 전체에 큰 충격이었으며 특히 그를 아들처럼 아끼던 되니츠의 슬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였다. 더우기 독일국민 전체의 영웅이라고 할수 있는 프린의 죽음이 국민들에게 미칠 충격을 염려하여 독일군 사령부에서는 권터 프린의 전사를 5월까지 발표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프린이 마지막으로 수송선단의 위치를 타전한 3월 7일 오전 4시 24분이후 U47의 연락이 완전히 단절되었고 독일군이 혹시나 하고 U47의 귀환을 기다려 보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U47이 격침되는 과정이 상세히 알려진 것은 전쟁이 끝난후 1946년 간행된 영국정부의 문서에 의해서였다. 

U47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되니츠도 프린의 전사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때 전해군장병들에게 발령한 통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스카퍼플로우의 영웅에게 이번출격은 마지막 출격이 되었다. 우리들은 프린과 그의 부하들에게 충심으로 조의를 표한다. 그들이 영국해군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우리의 부동의 신념의 상징이며 우리들도 이러한 신념을 견지하면서 싸워야 할것이다." 

*3명의 격침왕을 잃다. 

권터 프린의 전사에 이어 3월 17일에는 U100의 함장인 '요아힘 셰프케'와 U99의 함장 '오토 크레치머'를 잃게 됨으로서 U보트 부대는 3월 한달동안 최고의 U보트 전사 3명을 잃는 결과가 되었다. 

요아힘 셰프케는 U3과 U19를 거쳐 1940년 5월 30일부터 U100의 함장이 되었다. 그는 그때까지 대서양과 북해방면에서 14회의 작전항해를 실시햐였으며 1940년 7월 1일에는 그간의 전과와 모범적인 인품으로 7번째로 백엽 기사철십자장을 수상하였다. 

U99의 오토 크래치머는 그때까지뿐 아니라 대전 전기간을 통철어도 1위의 격침전과를 올린 최고의 U보트 에이스로서 1936년 12월 1일부터는 U35에 탑승하여 스페인 내란의 지원임무에 나서기도 하였다. 1937년 10월 1일에는 U23의 함장이 되었으며 1940년 4월 18일 U99의 함장이 되었다. 

크레치머는 비스케만 해역을 필두로 16회의 작전항해에 나서 냉철한 판단력과 직감으로 꾸준히 격침전과를 올렸으며 때로는 미리 영국군 수송선에 자신들의 존재를 통고하고 격침시키는 기사도정신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U보트 부대의 슈퍼 에이스 2명은 1941년 3월 16일

2차대전사 게시판은 부운영자이신 메일박스님이 관리를 해주십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실분은<BR>다음 원칙을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BR>1.제목은 이용자들이 검색시 찾기쉽게 명확히 한다.<BR>2.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은 제외하고 반드시 출처를 밝힌다.*신장비를 개발하는 영국 

보급이 바닥난 U보트의 귀환으로 11월부터 격침전과가 줄어들기 시작한것과 아울러 U보트 부대에는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기 시작했다. 우선 이 시기는 기상조건이 악화되어 허리케인이 심하게 불어 소형함인 U보트는 거센 파도속에서 제대로 항해할수 없었다. 두번째는 이 시기가 독일군의 영국본토침공이 거의 무산될 시기였으므로 영국해군이 본토방어를 위해 남겨두었던 호위함들을 선단호위에 투입할수가 있었던 점이다. 

여기에 처칠수상의 끈질긴 노력으로 미국으로부터 중고 구축함 50척을 공여받아 1940년말부터 선단호위에 투입하였고 선더랜드 비행정의 초계비행도 크게 강화되었다. 특히 대U보트 작전을 위한 항공전력의 증강은 크나큰 위협이었다. 게다가 영국군은 12월 4일자로 영국연안항공대를 해군에 편입시켜 대U보트 작전을 원하하게 하도록 했다. 반면 독일군의 경우에는 공군의 지원을 받아 적선단을 먼저 발견하고 U보트부대를 유도할 필요가 있었지만 공군과 해군의 계속적인 알력으로 항공지원을 받는다는것은 꿈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U보트 부대가 배속받은 항공기는 겨우 Fw200 콘돌 1개 비행대뿐이었다. 이것도 처음에는 괴링이 모르는 가운데 배속되었다가 괴링이 이를 알고 다시 원상복귀시키려 하자 되니츠가 괴링과 싸우다시피해서 얻어낸것이었다. 

*대U보트 장비의 발달 

U보트에 대해 또 하나 위협이 된 장비가 등장했으니 그것은 무선방위측정장치였다. 이 장치는 육상 또는 항해중인 선박에 장비된 수신기를 이용해 U보트가 발신하는 전파를 포착하여 U보트의 위치를 판단하는 장치였다. 이 장치는 U보트의 위치를 포착할뿐만 아니라 U보트로 하여금 무전을 통제하도록 강요함으로서 U보트들이 집단전술을 구사할수 없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또한 영국군은 U보트의 발신장치를 역이용하여 완전히 활용할수 있도록 하기위해 되니츠의 U보트 정보실에 해당하는 잠수함 탐지실을 런던의 해군성에 설치했다. 여기서는 아주 사소한 정보까지 수집하여 기록함으로서 항시 대U보트작전에 있어서 최신정보를 유지할수 있었다. 이것은 대단한 효과가 있어서 만일 수송선단이 U보트를 만날위험지역에 진입하려하면 즉각 경고를 보내 피할수 있도록 할수 있었다. 

또 한가지 영국군은 중요한 장비를 함정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레이더로서 초기의 원시적인 형태보다 훨씬 소형에 조작도 간편한것을 개발하여 호위함정과 대잠초계기에 장비시켰다. 이 레이더를 이용함으로써 야간에도 수상의 U보트를 수색할수 있게 되었으며 아즈딕이 수상함에는 효과가 없었던것을 완전히 보완할수가 있었다. 또한 야간집단공격을 장기로 하는 U보트부대가 야간에 수면위로 부상하는것이 포착되므로 U보트부대의 수면부상공격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국은 항공전에서도 그랬지만 현대전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좋은 전파병기의 개발에 있어서 항시 독일에 앞서고 있었다. 독일은 이미 1935년경 극초단파 레이더를 개발했지만 당시 독일의 과학자들은 레이더의 장래성에 의심을 품고 그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그러는 동안 영국은 레이더를 비롯한 전파병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해 장거리 초계기에도 레이더를 장비함으로서 U보트 수색능력은 비약적인 향상을 보이고 있었다. 

*권터 프린의 최후 

1941년 1월의 격침전과는 21척 127000t, 2월은 37척 197000t 으로 그런대로 나쁜편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용맹한 U보트 함장들의 분투에 의한것으로서 실제 상황은 점차 나빠져 갔다. 그리고 1941년 초에는 3명의 격침왕을 잃는 액운이 발생했다. 

우선 U47의 권터프린은 스카퍼플로우작전뒤 휴식을 취하고 1941년 2월 20일 로리안 군항을 출발하여 스코틀랜드의 불방해역에서 U보트 부대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이 출격에는 또다른 U보트 영웅인 U99의 오토크레치머가 있었고 역시 U보트 최고의 에이스인 요아힘 셰프케의 U100도 같은 장소를 향하고 있었다. 출격 이틀후 적 선단을 발견하고 서서히 추격하던 프린은 잠시 선단을 놓치기도 했지만 5시간후 다시 그들을 발견하여 호위함의 폭뢰공격을 피해가며 공격을 감행, 22000t의 전과를 올렸다. 

1941년 3월 6일에는 아프리카로 향하는 영국의 OB293선단을 발견했다.프린은 주변의 동료들을 불러들인뒤 밤이 되기를 기다려 특유의 야간 집단전술을 구사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U보트 부대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2척의 수송선이 격침되고 2척이 격파되었다. 하지만 영국군도 이제는 대잠장비를 충실하게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무선방위측정장치를 이용해 U보트의 위치를 파악한 호위구축함들은 즉각 폭뢰세례를 퍼부어 U70을 비롯한 2척의 U보트가 격침되고 만다. 그리고 프린의 U47과 오토 크레치머의 U99도 급히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U47은 다시금 수송선단을 공격하기위해 추적을 시작했다. 3월 7일 오전 4시 24분 프린은 사령부에 수송선단의 위치를 타전했다. 이것이 영국군에게 다시금 포착되어 U47은 호위함들의 추적을 받게되었고 아주 나빴던 기상상태가 갑자기 좋아지면서 수면위로 부상해있던 U47은 영국 구축함 울버린의 시야에 들게 되었다. 

U47은 급속잠항을 시도했으나 울버린은 때를 놓치지 않고 폭뢰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U47의 추진기가 파괴되어 잠수함으로서는 치명적인 소음이 발생하여 U47은 음파탐지기에 포착되고 만다. 울버린은 U47에 다시 폭뢰공격을 가해 결국 U47은 격침되고 만다. 스카퍼플로우의 영웅 권터프린은 이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았고 U47의 승무원 전원도 프린과 운명을 함께 했다. 

권터 프린의 죽음은 독일 U보트부대 전체에 큰 충격이었으며 특히 그를 아들처럼 아끼던 되니츠의 슬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였다. 더우기 독일국민 전체의 영웅이라고 할수 있는 프린의 죽음이 국민들에게 미칠 충격을 염려하여 독일군 사령부에서는 권터 프린의 전사를 5월까지 발표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프린이 마지막으로 수송선단의 위치를 타전한 3월 7일 오전 4시 24분이후 U47의 연락이 완전히 단절되었고 독일군이 혹시나 하고 U47의 귀환을 기다려 보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U47이 격침되는 과정이 상세히 알려진 것은 전쟁이 끝난후 1946년 간행된 영국정부의 문서에 의해서였다. 

U47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되니츠도 프린의 전사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때 전해군장병들에게 발령한 통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스카퍼플로우의 영웅에게 이번출격은 마지막 출격이 되었다. 우리들은 프린과 그의 부하들에게 충심으로 조의를 표한다. 그들이 영국해군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우리의 부동의 신념의 상징이며 우리들도 이러한 신념을 견지하면서 싸워야 할것이다." 

*3명의 격침왕을 잃다. 

권터 프린의 전사에 이어 3월 17일에는 U100의 함장인 '요아힘 셰프케'와 U99의 함장 '오토 크레치머'를 잃게 됨으로서 U보트 부대는 3월 한달동안 최고의 U보트 전사 3명을 잃는 결과가 되었다. 

요아힘 셰프케는 U3과 U19를 거쳐 1940년 5월 30일부터 U100의 함장이 되었다. 그는 그때까지 대서양과 북해방면에서 14회의 작전항해를 실시햐였으며 1940년 7월 1일에는 그간의 전과와 모범적인 인품으로 7번째로 백엽 기사철십자장을 수상하였다. 

U99의 오토 크래치머는 그때까지뿐 아니라 대전 전기간을 통철어도 1위의 격침전과를 올린 최고의 U보트 에이스로서 1936년 12월 1일부터는 U35에 탑승하여 스페인 내란의 지원임무에 나서기도 하였다. 1937년 10월 1일에는 U23의 함장이 되었으며 1940년 4월 18일 U99의 함장이 되었다. 

크레치머는 비스케만 해역을 필두로 16회의 작전항해에 나서 냉철한 판단력과 직감으로 꾸준히 격침전과를 올렸으며 때로는 미리 영국군 수송선에 자신들의 존재를 통고하고 격침시키는 기사도정신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U보트 부대의 슈퍼 에이스 2명은 1941년 3월 16일 일몰직전 아일랜드의 HX112고속수송선단을 포착, 공격준비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우수한 대잠탐지장비로&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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