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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프랑스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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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5월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에 돌입했을때 프랑스 육군이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더 많은 전차를 보유했으며 기술수준도 월등하였고 무기와 총포도 우수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에 패배했고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프랑스 육군의 Char B1중전차 당시에는 독일군 전차는 대응을 못할정도로 강했지만 전차 운용능력에서 독일군의 전격전에 미치지 못했다.



그 원인은 여러가지 있는데 먼저 독일군의 침공계획을 살펴봐야 한다.

1939년 11월 독일의 서부전선 공격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의 유명한 슐리펜(Schlieffen)계획과 매우 유사했다. 즉 집중은 우익에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1914년 당시보다 약간 광범위하게 선회하고 네덜란드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보크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B집단군에 이 작전이 위임되었는데 B집단군은 모든 독일군의 10개 기갑사단을 포함하여 주공은 리에즈의 양측에서 수행되며, 룬트시테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A집단군은 아르덴을 횡단하여 뮤즈강 선까지 보병으로 밀어 붙임으로써 공격을 지원하고 리프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C집단군은 마기노트 방어선에 대한 방어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을 실시하는데는 몇 가지의 문제점이 있었다. 당시의 A집단군의 참모장인 만슈타인 장군은 특히 주공을 우익에 둔다는 데 반대하였으며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은 브뤼셀 지역에서 독일군 기갑부대와 프랑스 및 영국군의 정예 부대간에 정면 충돌을 유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1914년의 독일군 전략을 답습한다는 것은 항상 승리를 가장 확실히 보장하는 기습에 대한 전망을 무산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만슈타인 장군은 정교하고 아주 독창적인 계획을 입안했다.

대공격은 여전히 우측방에 계획되었고 B집단군은 3개 기갑사단과 가용한 모든 공정부대를 가지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공하게 되어 있어서 B집단군의 진격은 실로 가공하고 요란스러우며 장관이리라 예상되었다. 이 진격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중요 지점에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는 것과 병행될 것이며, 적이 이 진격을 주공으로 간주하여 뮤즈강선에 이르러 브뤼셀과 앤트워프를 엄호하기 위하여 프랑스-벨기에 국경을 넘어 신속히 이동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이 이 지역에 투입되면 될수록 그들의 파멸은 자명해 질 것이었다.

결정적인 역활은 A집단군에 부여되었다. A집단군은 제4, 12, 16군등 3개군과클라이스트 기갑혼성군을 포함하고 있었다. 호트 기갑군단을 포함하고 있는 제4군은 뮤즈강의 남부로 진격하여 지베와 나무르 중간에서 뮤즈강을 도하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공은 제12군 전방에서 클라이스트 혼성군에 의해서 수행되는 것이었다. 이 클라이스트 기갑혼성군은 라인하르트의 기갑군단(제6, 8기갑사단), 구데리안의 기갑군단(제1, 2, 10기갑사단)과 비터샤임 기계화군단(5개기계화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그곳은 전차 기동에 부적절한 지역이며 거의 충분한 방호도 제공받지 못하는 아르덴 산림지대의 험한 지형을 횡단하고 세당에서 뮤즈강의 도하를 강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다음은 신속히 서쪽을 휩쓸어 벨기에에 있는 연합군의 측후방 깊숙히 밀고 들어가며 그들의 좌측방은 최초부터 제16군에 의해서 엄호를 받게 되었다.

제3, 4기갑사단으로 구성된 헤프너 기갑군단은 브뤼셀 방향으로 벨기에를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며 한편 제9기갑사단은 네덜란드의 남쪽에서 서진하는 것이었다.

독일군 최고사령부에서 채택된 계획은 만슈타인 장군의 권고와 착상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만슈타인 장군의 제안은 처음에는 상당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이상한 일로해서 동의를 얻게 되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1940년 1월 독일 제7비행사단 연락기 1대가 항로를 잃어버려서 벨기에 영토내에 불시착하였다. 비행기에 타고있던 한 장교는 그의 주머니에 프랑스 침공을 위한 최초 계획 사본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가 그 사본을 파기했는지 안했는지 확실히 알수가 없었는데다가 히틀러가 만슈타인의 계획의 독창성과 대담성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에 만슈타인 장군의 계획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5월 10일 05:35시에 독일 육군의 선두부대들은 "황색공격계획"에 의거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의 국경을 통과하였다. 폴란드에서 독일군은 공중우세의 잇점을 누렸지만 벨기에와 남부 네덜란드로 몰려들고 있는 영·불연합군의 부대에 대한 방해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독일육군 총사령부는 독일군이 바라고 예상했던 바와 같이 연합군이 독일군의 공세에 따라 대응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당시 영·불 연합국은 1939년 11월 17일 파리에서 열린 연합군 최고군사회의는 "D계획"을 채택한 바, 이 계획은 독일이 벨기에를 통과하여 공격으로 나오는 경우 프랑스의 제1, 9군과 영국 파견군은 앤트워프에서 루반, 나무르, 지베를 거쳐, 메제르에 이르는 딜, 뮤즈 양강에 따르는 벨기에의 주요 방위선에 급격히 진출할 것을 결정하고 있었다. 파리회의가 열리기 수일전 영·불의 참모부는 벨기에 최고사령부와 비밀리에 회담을 거듭하여, 벨기에 측에서 이 방위선을 강화하여 이곳을 중요 저항진지로 할 확약을 맺었다.

그러나 벨기에 측에서는 아직도 중립의 희망에 사로잡혀, 전쟁에 말려들지 않고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굳게 하여 그 이상은 회담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는 않았다. 영국 참모부는 독일이 한번 공격하기 시작하면 연합국은 전선을 전개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프랑스 가믈랭 장군의 강력한 주장으로 겨우 D계획에 찬성했다.

11월이 다 갈 무렵 연합국측은 네덜란드가 공격당할 경우, 앙리 지로 장군의 제7군을 영·불 해협 해안에 급행시켜 앤프워프 북방 네덜란드의 저항선을 구원하는 계획을 추가했다. 이리하여 독일군이 벨기에를 - 그리고 아마도 네덜란드까지도 - 석권하여 마지노선의 측면을 돌파하려는 기도는 전투개시의 시초부터 전 영국 파견군과 프랑스의 주력군 그리고 22개 사단의 벨기에군, 10개 사단의 네덜란드군과 대결하게 된다. 따라서 1940년 5월의 독일군의 B집단군의 공세는 완전히 연합군측에서는 바라는 바였던 것이다.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작전의 승패는 산림이 우거진 아르덴 고원으로 돌진하여 뮤즈강으로 향하는 클라이스트 기갑 혼성군에 달려 있었다. 이 당시의 독일군의 승리는 주로 - 기습과 집중 - 2가지의 전쟁 원칙을 능란하게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 육군은 실제의 있어서 사단의 수뿐만 아니라 특히 전차의 수에 있어서도 연합군보다 열세하였다. 개전시 연합군은 156개 사단이었고 독일군은 136개사단이었다. 영·불 연합군은 약 4,000대의 전차를 보유한 반면 독일 육군은 10개 기갑사단과 SS기갑연대 등 단지 2,800대의 전차만이 참전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군은 질적인 면에서도 아무런 유리점이 없었다. 연합군 전차 그리고 특히 영국군의 마틸다 전차는 독일군보다 더욱 강한 장갑을 가졌으며 또한 독일의 주전차인 3호전차에 탑재된 37밀리포도 영국의 2파운드포만 못하였다. 다만 독일군의 전차는 속도면에서 약간 우세하였다. 독일군은 전차의 속도를 최대로 활용하였고 전차부대의 운용에 대한 기술 개발에도 크게 힘썼다.

그리고 결정적인 요소는 독일군이 세당과 나무르 사이를 돌파하기 위하여 10개의 기갑사단중 7개를 집중 투입하였고 이중 5개 사단은 세당 지역에 집중시켰다는 점이다.

연합군의 군사 지휘자, 특히 프랑스의 지휘관은 아직도 제1차세계 대전의 선형전술의 견지에서 생각했고 또 그들은 기갑부대를 보병사단에 분할 시켰다. 영 제1기갑사단은 프랑스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며 4개의 프랑스 기갑사단은 편성된지 얼마되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군은 그들의 기갑사단을 집중 운용할 것과 바른 기동전술을 고려하지 않았다. 스위스 국경으로부터 영국해협까지 전전선에 걸쳐 그들의 기갑부대를 분산운용함으로써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는 독일군에게 유리하도록 행동했고 그 결과 일어난 참사에 대해서 탓할 사람이 없었다.

전투방법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것보다는 원칙의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방법론적 전투에 치중했던 프랑스 전략은 독일의 전격전에 대항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훈련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부대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빨리 이동시키고 예상외의 사태에 대처하는 훈련이 부족했다. 그저 예상했던 대로 명령받는 대로 상관이 지시하는 대로 대처하는 것에만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것이 부하들을 훈련시키는 방법이었던 것이고 또 이런 전투방식에는 많은 무전기가 필요치 않았다. 그저 전선을 달리면서 전화같은 것을 이용해서 상부와 연락을 취하면 되었고, 조명탄을 사용할 수 없으면 수신호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전기는 필요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 전차나 지휘차량에는 무전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원인은 원칙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프랑스는 그들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기본원리로 부대배치를 정했던 것이다. 단순히 무전기 사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프랑스가 했던 훈련은 조심스럽게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긴다든지 다른 전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많은 경험을 요구하지 않았고 지휘관들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대로 자신들의 원칙을 고수했던 것이었으며 전쟁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독일전차가 주요 교전지역으로 돌입했을 때 프랑스는 독일전차에 대해서 빠르고 신속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있는 준비는 되지 못했던 것이 패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B집단군의 공격은 연합군측에게는 주공으로 판단되어 영·불 연합군 병력 22개사단이 북프랑스로부터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과 앤트워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너무나 기뻐서 펄펄 뛰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무나 기뻐서 울고 싶었다. 놈들은 우리가 쳐둔 올가미에 고스란히 걸려든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아직도 그 뻔한 계획에 매달려 있다고 판단하고 그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지노선과 독일의 진정한 주공인 아르덴 방면에는 소수의 프랑스군 2선급 병력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마지노선에 대해서는 철벽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아르덴 지방은 수목이 너무나도 빽빽하게 밀생하여 도저히 전차와 같은 기계화부대의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믿어지고 있었고 또 우방국 벨기에의 국경인 만큼 마지노선이 연장되어 있지도 않았으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대규모의 지뢰를 매설해 둔 것에 불과했다.

5월 10일밤 아르덴을 돌파한 독일군의 7개 기갑사단은 5월 12일에 뮤즈강변에 이르렀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이 강의 프랑스쪽 대안에는 수백문의 포대와 급경사의 둑으로 공격이 어려울 것 같았으나 독일군은 폴란드에서와 마찬가지로 공군의 지상지원에 힘입어 13일에는 뮤즈강을 도강할 수있었다.

5월 14일은 공격한 지 5일째에 불과했으나 운명적인 날이었다. 전날 밤 독일의 기갑부대는 디난에서 세당에 이르는 가파른 둑과 산림으로 뒤덮인 뮤즈강을 건너는 4개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몰트케에게 항복하여 제3제정의 종말을 고한 무대가 된 세당을 점령하여 연합군 전선의 중심부와 영·불군의 정예가 급히 벨기에로 우회한 전선에 중대한 위협을 주었다.

다음날인 5월 15일 병력의 사태가 쏟아졌다. 규모, 집결, 기동성, 공격력에 있어서 전사에서 전례를 보지 못한 전차군단 - 5월 10일 독일국경으로부터 아르덴 숲을 향해 진격했을 때는 3종대로 라인 후방 아득히 백마일까지 뻗은 대전차군은 프랑스의 제9, 2군의 전선을 돌파하여 벨기에에 있는 연합군의 배후를 빠른 속도로 해협을 향해 진격했다. 그것은 턱없이 크고 가공할 만한 쥬거너트(인도신화에서 말하는 달구지로 이것에 치이면 극락에 간다고 한다)였다. 이것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5월 20일 구데리안의 선봉부대는 아미엥과 아브빌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4년에 걸쳐 진격했던 것보다 더 먼 거리를 단 열흘 동안에 주파해 내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이들의 빠른 진격에 의해 프랑스 북부에 고립된 연합군 병력은 거의 100만에 달했고, 그 중에는 벨기에군 전부와 영국의 대륙 파견군 3개 사단, 프랑스가 자랑하는 최정예 20개 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5월 16일 처칠 수상은 파리로 가서 레이노 수상과 가믈랭 장군을 만나기 위해 케도르세(프랑스 외무성)로 차를 몰고 있을 때 독일군의 공격 최전선은 세당의 서방 60마일 지점에 도달하여 무방비의 평야지대를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독일군과 파리 사이에도, 그들과 해협 사이에도 그리 큰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처칠은 그것을 몰랐다.

"전략 예비군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처칠이 가믈랭 원수에게 묻고 그리고 갑자기 프랑스어로 바꾸어 "Ou est la force de ma noevre?"했다.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영국 수상 쪽으로 돌아서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Aucune - 하나도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기갑부대들의 눈부신 진격에 모두가 얼이 빠져 불과 얼마 안 되는 기갑부대를 가지고 아슬아슬한 모험을 해 가면서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독일군의 내막 같은 것은 확실히 알아 볼 수 없었다. 속도와 방법에 있어서 새로운 형태의 공격전술에 대처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 두었던들, 그리고 연합군의 지휘관들과 전투부대들이 사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면 독일군의 전격적인 침공을 막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연합군측의 그 당시 사정은 그렇다치고 독일군 측도 침공에 성공하기는 했어도 사실상 힘겨운 일련의 긴 경기에서의 결승점을 간신히 얻은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이것은 모두 구데리안이나 롬멜과 같은 다이나믹한 지휘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당시 세계 최강의 육군을 가진 프랑스는 전쟁에 지고 만 것이다.

독일군보다 더 뛰어난 전차와 더 많은 병력을 가진 프랑스는 불과 6주일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앞에서 말한 것으로 어느 정도는 프랑스가 패배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기습과 집중’이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전쟁의 원칙을 나타낸 말이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2001년 12월23일 메일박스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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