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전선의 전쟁-첫번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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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간단한 전황만 소개 합니다.
이미 많은 예기들을 기술한바.
1.모스코바전투
러시아대륙의 중핵이자 소비에트 정권이 위치한 모스크바는 러시아 공업지대의 심장부였을 뿐만 아니라 철도 네트워크의 중심 도시였다. 따라서 이런 이유로 인해 모스크바는 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가장 중요한 단일 군사목표였다.
바바로사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독일군 일반참모본부는 스탈린이 모스크바와 그 주변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소련의 인적자원과 예비물자를희생할 것이라 예상하였다.
처음 히틀러는 소련군 전선을 돌파한 뒤 남과 북으로 전진하는 방안을 선호하였으나 41년 10월 2일 주공을 모스크바로 전환하였다. (Operation TYPHOON) 그러나 소련의 모스크바로의 진격은 2차대전 중 독일이 경험한 첫 번째이자 가장 심각한 패배를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41년 10월 10일 스탈린은 주코프Georgy onstantinovich Zhukov대장을 서부집단군WestFront사령관에 임명하였고 주코프는 모스크바 서쪽 100km에 위치한 Mozhaisk를 중심으로 남과 북 약 280km에 걸친 전선에8개군을 전개시켰다.
한편 보크가 지휘하는 독일의 중앙집단군은 남북으로 걸친 전선에 제2군, 제2장갑군Second Panzer Army, 제4군, 제4장갑부대Fourth Panzer group, 제3장갑부대, 제9군을 배치시키고 있었지만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 군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양군의 병력은 100만명 정도로 거의 대등하였다.
타이푼 작전 개시 후의 독일 중앙집단군의 전진속도는 소련군의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고 10월 14일 소련 북부지역 방어의주요도시인 칼리닌Kalinin이 독일군이 손에 떨어지고 다시 나흘 뒤 Mozhaisk가 함락되자 모스크바는 공황 분위기에 휩싸였고 소련군 내에도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0월 19일 소비에트정부는 모스크바 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정부기구와 조직을 쿠이비세프Kuibyshev로 소개 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도래한 가을 장마는 비포장된 러시아 평원의 도로를 진흙바다로 만들었고 이때문에 독일군의 진격은 약 3주정도 늦추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공군은 모스크바 폭격대신 전선에서 소련 지상군 공격에 주력하였다. (소련측 자료에 의하면 개전 초 6개월 동안 단 229대의 독일공군 항공기가 모스크바 상공에서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 지연기간 중 주코프는 전선에 배치된 병력들의 훈련과 사기앙양에 주력하였고 스탈린은 볼가 강Volga 건너편에 주둔한 9개 예비군을 소집하였다. (1개 군당 약 10만명의 예비군은 전투경험이 없는 고령자나 연소자로 구성되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무장 되지 못하였다.) 아울러 일본군과의 전투를 대비해 잘 훈련된 시베리아 주둔사단들도 기차를 통해 전선으로 수송되기 시작하여 전체적으로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하려는 소련군의 전력은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1월 15일 타이푼작전이 재개되었을때의 전황은 독일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광활한 동유럽평원은 전차의 기동을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얼어붙었고 개전초기 독일군을 괴롭혔던 흙먼지와 해충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탁 트인 지형은 독일육군의 장기인 전차전을 펼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이런 이점으로 인해 공격 첫날 제9군은 전면에 위치한 모든 소련군을 전투불능 상태로 몰아넣었다. 11월 27일 제3장갑부대는 모스크바에서 북방 60km에 위치한 모스크바- 볼가 운하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였고 우익의 제4장갑부대에 소속된 사단은 모스크바 근교 20km지점까지 육박하는데 성공하였다. 또 제2장갑군은 툴라Tula를 지나 모스크바 남서쪽의 카시라Kashira까지 진출하여 스탈린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소련군 전면 붕괴의 시나리오가 현실화 됨과 동시에 보크의 중앙집단군의 상황도 악화 되기 시작했다. 보크는 예비부대가 전혀 없었으며 더군다나 포위망의 서부 측면을 담당한 제4군의 진격이 늦어지는 바람에 모스크바 함락계획에 1주일 정도 차질이 생겼는데 이때부터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독일군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12월 4일 밤 폭설이 내린 후 기온은 -34도까지 급강하하여 대부분의 독일군 장비를 무력화시켰고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는 동절기용 의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독일병사들을 괴롭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2월 5일 주코프는 마침내 전 전선에 걸쳐 대반격 작전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날밤 기온은 다시 -40도까지 떨어졌고 다음날 아침 독일 장갑정찰대의 초계활동으로 커버되던 독일군 전선사이의 간격은 소련군의 대반격작전을 위한 통로로 변해 버렸다.
쇄도하는 소련군과 교전하려고 노력했던 독일군은 혹독한 추위에 의해 무용지물이 된 전차와 포, 트럭들을 포기한 채 퇴각하여야 했다.
(포는 추위로 인해 윤활유가 얼어 붙으면
1.작동이 곤란해지거나
2.계속적인 사격이 불가능해지고
3.사거리가 줄어들거나
4.사격속도가 느려지거나
5.불발탄이많이 발생한다. 또한 박격포는 사격시 얼어붙은 땅과의 충격으로 포판이 깨어지고 전차와 차량은 엔진동파방지를 위해 계속 시동을 걸어주어야만 한다.)
눈보라는 독일군의 퇴각과 통신수단을 마비시켰고 서부지역으로 급히 후퇴하려는 부대들로 인해 도로는 극심한 체증을 겪어야만 했다.
12월 16일 모스크바 북쪽 독일군 돌출부와 툴라 북서쪽의 위협은 마침내 제거되었고 주코프는 대반격작전을 2단계로 전환시켜 후퇴하는 독일군을 뒤쫓아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틀 후 중앙집단군 사령관인 보크원수는 병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 하였고 독일육군 총사령관인 폰 브라우히치원수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후임으로 히틀러는 클루게 원수를 지명하였고 브라우히치를 해임하고 자신이 직접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사령관에 임명된 후 히틀러는 모든 지휘관들에게 결사 항전과 어떤 이유에서라도 후퇴를 금지하는 명령을 하달하였고 후퇴금지 명령을 어긴 지휘관은 곧바로 해임되었다. 이때 해임된 지휘관 중의 한명이 바로 히틀러가 가장 신임하던 장군 중 한명이었던 구데리안이었다.
42년 1월 7일까지 주코프는 독일군을 41년 11월 타이푼작전이 재개될 당시의 전선으로 퇴각시켰고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 독일군을 스몰렌스크Smolensk까지 내몰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독일 중앙집단군의 포위섬멸을 염두에 둔 스탈린은 소련군의 주공을양 익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스탈린의 계획은 소련육군의 작전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고 전투가 지속됨에 따라 독일군은 점차로 패배의 충격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봄이 되어 해빙기로 인해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비록 전투의 주도권은 소련군으로 넘어갔지만-중앙집단군은 여전히 모스크바에에 위협으로 존재하였다
출처:my.netian.com/~meyer
2002년 01월08일 메일박스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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