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차에 대한 이야기 (1)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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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전차의 설계와 운용에 있어서
2차대전 내내 밑바닥에서 헤매고 다녔다는 악명이 따라다니며
언제나 최악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일본 전차에 관한 잡담을 해보려고 합니다.
서툴게나마 또 긴 글을 써보았지만, 제가 워낙 미시적인 관점을 선호하고
특히 조악하고 형편없는 전차들만 편애하기 때문에
이 글이 딱히 어떤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쨋든 이웃나라가 만들어낸 허접 전차들의 세계 속으로
심심풀이 정도로 잠시 한번 들려보기로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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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서유럽에서 <전차>라는 이름의 신무기가 탄생하였다는 소식은
당시 1차대전의 호경기를 누리던 일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영국과 프랑스제 전차들을 수입하여 여기저기 뜯어보기 시작합니다.
최초의 국산 전차를 1922년에 이미 제작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저의 짦은 생각에는 1927년 오사카 병기창에서 뚝딱뚝딱 만들어 낸 모델을
일본 전차의 본격적인 시초로 잡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일본 전차의 역사는 <토미오 하라> 라고 하는 군인 아저씨가
이후의 전차 설계에 있어서 기본적인 틀이 되었던
독특한 서스펜션(bellcrank scissors suspension)를 개발하면서
비로소 가속도를 내기 시작합니다.
2개조의 차륜을 차체 밖에서 코일로 수평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이라는데
기계는 완전 까막눈인 저로서는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지만,
95식 경전차나 97식 중전차의 옆면을 보시면 다른 분들은 아마 쉽게
이해를 하실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본 육군이 최초로 전차를 전투에 운용하기 시작한 곳은
1932년 1월 하얼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르노 FT-17과 르노 NC-27 전차가 모습을 드러내자 중국인들이 곧 후퇴하는 바람에
일본 전차부대의 데뷔전은 싱겁게 끝이 납니다.
다음달 2월의 상해사변에 가서야 그들이 만든 국산 전차가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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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사진 속의 89식 중전차가 어느 정도 쓸모가 있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서스펜션에 대하여 항상 말이 많았던 르노 NC-27은 이제 더이상 타고 다니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89식 중전차 역시 속도가 너무 굼뜨다는 지적을 받고 있었습니다. (최고시속 25 km)
따라서 1934년 미쯔비시 중공업에서 차기 모델이 제작됩니다.
바로 97식 중전차와 더불어 일본이 가장 많이 생산하였던 95식 경전차입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속도>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입니다. (최고시속 40 km)
95식 경전차는 그 후 2,375대나 생산되면서 일본 전차의 대표적인 상징의 하나가 되는데
특히 이들의 빈약한 무장과 얇은 장갑(최고 12mm)은
<일본 전차는 전체적으로 조악하다>라는 인상을
사람들 머리속에 깊이 심어주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됩니다.
초창기에는 주무장으로 37mm 94식 대전차포를 머리에 달고서
그밖에 2정의 7.7mm 기관총을 정면과 뒷꽁지에 각각 하나씩 붙이고 나왔습니다.
조잡하고 유치한 것들에 유독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이러한 외관이 귀엽게 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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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만주 스페셜(Manchuria Special)로 불리는 밑의 사진 속의 모형은 서스펜션 부분을
지형에 맞게 약간 손봐서 대지횡단능력을 개선시킨 변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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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하여 이렇게 엉금엉금 기계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중국의 장개석 정권은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을 거의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며칠전 르노 전차 어쩌구 라는 잡담 (4)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던 것처럼
장작림 아저씨가 가장 먼저 전차를 국내에 도입한 예를 보듯이
각지에 할거한 군벌이 저마다 우후죽순식으로 다양한 기계화 차량을 갖고 있었던 탓에
국민당 군대가 이들을 통합하고 북벌을 완료한 시점에서도 큰 맘 먹고
전차의 규격화나 통일화를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외국인 군사고문관들이 고정적으로 중국에 머무르지 못하고
당시의 정세에 따라 철새처럼 돌아왔다 떠났다 한 일도
이러한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장개석이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와중에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한동안 철수하였고,
그동안의 공백기에 잠시 써먹었던 독일인 고문관들도
1938년 일본이 히틀러에게 압력을 넣으면서 하나둘씩 짐을 싸게 됩니다.
중일전쟁 발발로 다시 재개된 소련의 지원으로 국민당은 부랴부랴 독일제 전차들과
소련제 T-26 전차가 마구 뒤섞인 제200기계화사단을 편성하였지만,
이 부대가 1939년 12월 남경 방어전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한 이후부터는
태평양전쟁 후반에 가서 미국사람들이 새로운 전차부대를 만들어 주기 전까지
장개석은 일본군에 대항하여 전차를 투입할 전략을 완전히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국산전차를 서툴게나마 쏟아내기 시작한 일본군 역시
초보의 어리석음과 미숙함을 나타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937년 7월 화북침략 과정에서 전차의 집단적 운용에 관하여
<사까이>와 <도조> 사이에서 견해의 대립이 한동안 오갔지만,
여전히 일본군 수뇌부는 전차부대를 분산시켜 보병지원에 사용한다는
프랑스육군 스타일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1939년 3월 중국 장시성(江西省)의 남창(南昌) 공략전에서
<이시이>가 135대의 전차들을 한 곳에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전술을 채택하여
톡톡히 재미를 보았지만, 이러한 사례는 그냥 단발적인 해프닝으로 끝나버립니다.
몇달후 일어난 노몬한 사건을 겪고 나서도 그들은 결국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소홀한 준비와 안이한 대응 속에서도
89식 경전차와 97식 중전차를 주력으로 하는 일본 기갑부대는
말레이 반도와 동인도 제도를 손에 넣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완벽한 기습 또는 비열한 반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1942년 5월 필리핀의 정글에서 최초로 미국 전차와 마주치게 됩니다.
2002년 11월13일 메일박스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s://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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