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 FT-17 전차에 대한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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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 FT-17 전차가 프랑스와 독일은 물론 전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뒷배경에는
아마도 <무대뽀의 상징> 조지 패튼 장군의 일화가 작용하였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여지까지 기병대만 보아 오던 촌사람(?) 조지 패튼은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한 미군의 일원으로 당시 서부전선에 파견되었는데,
기계덩어리인 르노 전차가 전선을 헤집고 다니는 장면에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도 여전히 무대뽀였던 조지 패튼은 전차의 위력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9월 12일 애꿏은 부하들을 독려하여 5대의 르노 전차에 분승시키고 직접 전진합니다.
<갈 때까지 가보자>라는 심정으로 막무가내로 신나게 돌격해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내 곧 그들의 연료탱크가 바닥이 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연료공급 트럭이 교통체증(?)때문에 패튼이 있는 곳까지 달려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패튼 아저씨와 그의 불쌍한 부하들은 독일군의 기관총이 노려보는 앞에서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전차에서 하차하여 터벅터벅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고집불통 패튼은 이 일에 단념하지 않고
뫼즈-아르곤 공세(Meuse-Argonne Offensive)로 알려진 다음 작전에 참가합니다.
문제는 미군을 충분히 지원해 줄 수 있는 프랑스 전차의 수량이 부족하였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르노 FT-17은 잔고장이 많다는 고질적인 단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퍼싱 장군은 500대의 전차를 원했지만, 미군이 지원받은 것은 94대에 불과하였습니다.
어쩌면 르노를 몰고서 독일 영토까지 들어가 보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지도 모르는
패튼은 결국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 보병부대를 떠맡아 지휘하다가
엉덩이에 총알을 맞는 부상을 입습니다.
1차대전을 통틀어서 르노 FT-17의 총 손실댓수는 440대에 달하였는데,
그 중 81%에 해당하는 356대가 독일군의 야포에 의한 피해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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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말까지 3,000대가 넘는 물량이 생산된 르노 FT-17 전차는
1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잉여물자가 해외로 수출됩니다.
원주민의 독립운동에 골머리를 썩던 1921년의 스페인 육군 역시
르노 전차의 수많은 고객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XXX
일본 육군도 잠시 사용한 적이 있었던, 사진 속의 영국의 휘핏(Whippet) 전차는
스페인의 가난한 지갑으로는 어림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에,
가볍고 주행력이 좋다는 잇점 외에 무엇보다 가격이 싸다는 최대의 장점(?)을 갖고 있는
르노 FT-17의 수입이 쉽게 승인되었습니다.
1921년 8월 스페인 육군은 12대의 르노 전차를 구입하여
특별팀(?)을 구성하여 몇달동안 열심히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다음해 3월 이들은 보병의 한 무리와 합동하여
베니 세드(Beni Said)종족을 그들의 마을에서 쫓아내라는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3월 18일 새벽 6시에 감행된 이 공격은 처음부터 순조롭지가 못했습니다.
엔진의 점화장치가 말썽을 부린 데다가 때마침 내린 폭우로 인하여
지붕(?)으로부터 빗물이 새여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속 6 km도 내지 못하면서 전차들은 보병들에게 금새 뒤쳐지고 맙니다.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마을의 원주민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와
전차에 기어오르기 시작합니다.
보병의 협조가 없는 전차들이 쉽게 약점을 노출하였던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단도를 마구 휘둘러서 조종석의 관측을 위한 틈새로
조종수의 눈을 찌르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직성이 풀리지 않은 원주민들은 최후(?)의 무기로 바위를 집어들었고,
결국 스페인의 르노 FT-17 전차대는 완전히 죽어버린 2대를 남기고
허겁지겁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2001년 11월07일 메일박스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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