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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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 비롯된 세계 경제 공황은 온 세계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미국은 뉴 딜 정책을 실시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관세율을 높이는 등의 방법으로 자기 나라의 경제적 이익을 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은 경제 위기와 사회 혼란 속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아 독일 재무장을 선언하고 나섰다.
한편, 일본은 대륙 침략 전쟁을 일으켜 만주 지방을 점령한 다음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그와 같이 식민지를 가지지 못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대외 침략으로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려 꾀한 데서 세계 대전 발발의 위기는 높아 가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하자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 겸 대통령으로서 정권을 잡았다. 나치당이 도약한 계기는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공황이었다.
미국의 자본에 의존하여 소생하던 독일 경제는 그 어느 나라보다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독일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히틀러는 선동적인 연설로 불만으로 가득찬 대중 속으로 파고 들었다.
총통에 오른 히틀러는 민주적인 공화국을 폭력에 기초한 독재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전체주의 경찰국가가 탄생되어 어떤 형태의 저항도 잔인하게 억압되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 그의 동맹자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정당 외의 모든 정당을 불허했다.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기본권을 유린했으며 언론을 억압하였다.
히틀러 체제에 불만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 테러로 대처했고 많은 사람들이 재판 절차없이 감금되었다. 정당들이 해체되거나 무력화되었다.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은 후 히틀러는 대통령 제도를 없애고 자신을 수상 겸 총통이라고 불렀다.
이로써 제 3제국이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독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기술한 바 있는 이상, 즉 모든 독일민족국가들의 통합, 독일인을 위한 생활공간 확보, 그리고 천년제국의 건설을 실현하고자 했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국내 정치 혼란과 정치적인 반대자들 간의 폭력적인 투쟁, 세계경제 공황으로 야기된 대량실업에 맞서 고용창출 계획과 전쟁물자비축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실업을 신속하게 감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세계경제공황이 끝남으로써 유리한 입지를 얻었다. 또한 1935년에는 그때까지 국제연맹의 통치에 있었던 자아르 지방이 독일로 환속되었고 국방사령부가 재창설되었다.
힌덴부르크:
1847∼1934 독일의 군인, 정치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탄넨베르크의 싸움에서 러시아 군을 전멸시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916년에 참모 총장을 지내고, 종전 후 은퇴하였다가 1925년 대통령에 뽑혔다. 1932년에 재선되었으나, 나치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1933년에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 정권을 나치스 당에게 넘겼다.
1936년 3월 비무장 지역인 라인란트를 강점하고, 193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합병하였고, 3백여 만 명의 독일인들이 살고 있는 체코의 국경지대인 쥬데텐을 할양받았다.
이러한 대외정책의 성과들로 히틀러는 많은 계층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할 기반을 마련했다. 1939년 8월에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다음 그 해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맞서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폴란드 침공에 이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이어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쳐들어갔으며, 1940년 6월에는 프랑스의 파리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다시 1941년에 독소 불가침 조약마저 어기고 폴란드 동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독소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독일이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1943년에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대패하여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여 동부전선에서는 지속적인 방어만이 이루어졌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이탈리아군과 독일연합군이 패배하여 연합군은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여 1943년 9월에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영미 연합군은 시칠리아섬을 거쳐 로마를 점령, 이탈리아는 항복하였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서부전선도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1945년 5월에는 영국, 미국, 소련이 베를린을 점령함으로써 마침내 독일도 항복하였다.
라인란트:
독일 라인강 주변의 지명. 좁은 뜻으로는 라인강 중류의 왼쪽에 펼쳐진 옛 프로이센령의 라인주를 가리키나, 넓은 뜻으로는 라인강을 중심으로 하여 양쪽으로 넓게 펼쳐진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라인강을 끼고 독일과 프랑스·룩셈부르크·벨기에·네덜란드 사이에 있는 현재의 경계선 동쪽인 독일에 있다. 1920년대의 라인란트는 위기와 반목의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위험성 높은 지역이었다.
1923년 10월에 반란을 자주 일으켰던 분리주의자들이 라인칸트 공화국을 선포하였지만, 2주일도 채 못 되어 무산되고 말았다. 독일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던 프랑스는 독일에게 유화 정책을 쓰는 미국과 영국에 저항하였는데, 1930년 6월 30일에 마지막 점령군이 비로소 이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나치 독일은 1935년 5월 2일에 프랑스와 소련이 체결한 5년간의 상호 원조 조약이 종전의 국제 협약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프랑스 상원이 이 조약의 승인에 대하여 논란을 일으키던 중, 1936년 3월 7일에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 중 라인란트에 해당되는 조항을 이행하지 않고, 독일군이 비무장 지대로 들어갔다고 발표하였다.
히틀러가 군인들에게 프랑스인이 쳐들어오면 후퇴하라고 지시한 것을 몰랐던 프랑스군 참모장은 부분 동원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군사 작전을 펴지 않겠다고 버텼다. 프랑스 내각은 동원령을 내리지 않기로 하였다. 지지 부진한 국제 협상은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해제하는 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4년 6월 6일에 연합군이 서부 전선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 노르망디 반도에 상륙한 작전. 아이젠하워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영국, 미국의 41개 사단 약 100만의 병력이 5, 000척의 선박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상륙했다.
그 결과 연합군은 서부 전선에서 전면적인 진격 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되어 프랑스를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독일군의 붕괴와 전쟁의 종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작전으로 평가된다.
2002년 02월07일 L.V.P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s://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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