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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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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러시아 대피난(Flight 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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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당시의 동부전선은 치열했던 2차대전의 전선중에서도 증오와 분노가 넘쳐 민간인들의 희생이 많았습니다. 독일군이 전쟁초기 동부전선에서 행했던 잔학행위들은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 말기 독일인들은 밀려오는 소련군에 공포에 휩싸여 대규모 피난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들을 적시에 철수시키지 않고 방치함으로써 수백만 동프러시아 주민들을 소련군의 파도에 휩쓸리게 만들었고 주민들은 고통스럽고 혼란스런 피난길에 오릅니다.

이 글은 그 고통스러웠던 동프러시아 주민들의 피난길을 묘사한 것으로 한글판 '리더스 다이제스트' 1980년 6월호에 실렸던 '20세기의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정리한 것입니다.

(참고로 이 제목은 과거 훈족에 밀려 서쪽으로 대규모 이동했던 게르만족의 역사적 사건을 빗댄 것입니다.)

---[1945년 1월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소련은 나치독일에 대한 마지막 총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발트해연안 지금의 폴란드 및 동부독일령에 살던 약 400만의 독일계국민들은 공포에 질려, "로스케가 온다. 달아나자!"고 외치며 모조리 서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기차로, 마차로, 자전거로, 썰매로, 심지어 걸어서 뚜렷한 목표도 없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도망치는 산사태와도 같은 인간의 무리였다.

이 인간산사태 속에서 숱한 비극이 빚어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짐승처럼 죽어갔다. 이 '20세기 현대판 게르만민족 대이동'에 관한 얘기는 독일어판 리더스다이제스트 부주필 '에그베르트 키저'씨가 3년 동안에 걸쳐 각종 자료를 조사하고 생존자들을 면담하여 '단치히만, 1945년'이라는 책으로 엮어낸 것을 요약한 것이다. 아래의 발췌문에서는 편의상 피난민들의 이름은 가명을 썼다.]----

1.파멸의 전야

전세가 기운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모든 전선에서 독일군은 우세한 소련의 붉은군대 앞에 무너지고 있었지만 끈질기게 싸움을 끌고 나가고 있었다. 1945년 1월, 그때까지도 독일의 군인과 민간인들은 한결같이 곧 '기적의 무기'가 배치됨으로써 마지막 순간에 가서 전세가 역전되어 조국의 패망이라는 끔찍한 사태를 막아주리라 믿고 있었다.

한편 히틀러총통 밑에서 각급 참모장들은 몇 개 안 남은 사단을 놓고 서로 자기분야를 보강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서부전선을 최후의 영웅적 결전장으로 정해놓고 있던 히틀러는 소련이 동계대공세를 위해 동부전선에 대대적인 병력을 집결시켜 놓았다는 보고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것은 징기스칸 이후 최대의 허세야!"

히틀러는 소리질렀다.

1월초 육군 최고 사령부의 '하인츠 구데리안'장군은 독일군이 발트해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길게 배치되어 있던 동부전선 시찰에 나섰다. 독일군 약 70개 사단이 200개 사단이 넘는 소련군과 맞서고 있는 곳이었다.

소련의 군사력은 어마어마하게 우세했다. 보병 11대1, 탱크 7대1, 대포는 20대1이었다. 그리고 소련의 폭격기와 전투기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그에 대항해서 독일공군이 하늘에 띄울수 있는 항공기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거기다가 미국의 물자가 무르만스크, 블라디보스톡, 오뎃사등을 통해 계속 들어가고 있었다. 탱크, 대포, 막대한 양의 탄약을 실은 수송선들이 줄지어 항구에 도착했다. 소련 자체 내의 공장도 역시 전속력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소련군은 1944년 가을 공격을 시도했다가 격퇴당한 이래 몽고와 코카서스에서 이동해온 새로운 부대로 보강되어 있었다. 그들은 몇 달 동안 병사들의 휴가를 일체 허용하지 않은 채 날마다 무기조작 훈련을 마치고 나면 정치장교가 독일군에 의한 소련 대도시의 파괴된 모습과 레닌그라드, 하르코프,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독일군에게 학살당한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담은 영화를 보여주며 정치교육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가장 밑바닥에 있는 소총수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증오와 복수심을 불어넣었다.

독일군 전선은 발트해변에 면한 메델에서 남쪽으로 휘어져 내려가다가 동쪽으로 동프러시아를 감싸고 있었다. 전선이 만약 이 지역에서 무너지면, 그 후방에 있는 200만 독일주민들은 소련군 손아귀에 들어가는 셈이었다. 현지 군사령관들은 먼저 민간인들을 소개 시키고 약 20km를 후퇴하여 전선을 재편성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소련침공때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 수천명을 학살했던 현지 SS사령관 '에리히 코흐'는 단 한사람의 민간인도 떠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그는, "우리는 마지막 한방울의 피가 남아있을 때까지 동프러시아 땅을 단 한치도 내놓지 않을 것이다."라고 맹세했다. 히틀러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있던 코흐는 후퇴하는 지휘관은 누구를 막론하고 군법회의에 회부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가을 이후로 숱한 민간인들이 끌려나와 인스테르부르크와 단치히 사이에 대전차참호를 팠다. 깊이 6m, 너비7m의 거창한 참호들이었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다가올 위험이 얼마나 큰가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생활은 평화시와 다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예부터 내려오는 마소시장이 그대로 열렸으며, 영화관은 표가 매진되고, 거리에는 차량과 행인들로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시골에서는 탈곡기의 요란스런 소리가 항상 들려왔고, 수많은 양조장들은 예나 다름없이 분주했으며 거대한 재당공장에서는 지난가을 추수한 사탕무우를 절반이나 처리한 후였다. 조선소들은 전력을 다해 새로운 U-보트, 구축함, 소해정을 생산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동부전선 후방에서는 아무런 위험도 느껴지지 않았다.

1945년 1월 9일, 일선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최근 병력상황을 보고하고, 동부전선의 빈약한 병력을 보강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건의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노르웨이와 발칸반도에 있는 독일군대를 모두 후퇴시키고, 이탈리아전선을 단축해야 하며, 쿠르란드부대를 라트비아에서 해상으로 철수시켜야 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이 제시한 자료와 보고서를 책상에서 싹 밀쳐버리고 돌아앉아 버렸다. 그러나 구데리안도 물러서지 않았다.

"소련군이 단 한 군데라도 돌파에 성공하는 날에는 전전선이 장난감집처럼 무너질 것입니다."

"동부전선은 지금같이 강화된적이 없었어!"

히틀러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절대로 보강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독일 땅은 단 한치도 내놓지 않을거야!"


마침내 태풍이 몰아쳐 오기 시작한 것은 이 일이 있은지 사흘후의 일이었다. 그 태풍은 독일군의 동부전선을 휩쓸었음은 물론 히틀러의 제3제국까지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갔다.


출처:디코 천마 (CJSAK@defence.co.kr)



2002년 02월09일 운영자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s://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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