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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전선의 전쟁-네번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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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예기-세바스토폴(Sevastopol)전투

소련 해군 흑해Black Sea함대의 주요 기지중 하나인 세바스토폴은 전세계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중의 하나였다. 크림Crimea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침식된 석회암 지형은 육로를 통한 세바스토폴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절벽은 세바스토폴 만의 해군기지를 보호하는 훌륭한 천연 장애물이었다. 러시아 해군은 크림전쟁 기간1854-6부터 세바스토폴 요새를 유지, 현대화였고 요새 방어용 으로 총42문(구경 152mm부터 305mm까지)으로 이루어진 12개의 해안포대를 설치하였다.

독소전 개전 초기인 41년 10월 말 소련군 페트로프 Ivan Petrov소장과 약 32,000명의 독립 해군 육전대dependent Maritime Army는 해로를 통해 오데사Odessa로부터 세바스토폴에 도착하여 세 개의 방어 전선 구축에 착수하였다. 한편 9월 26일부터 11월 16일까지 만슈타인 중장이 지휘하는 제11군은 루마니아 제3군과 함께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크림반도 전 지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7개 사단을 보유한 만슈타인은 동부전선에 전개된 독일육군중 가장 규모가 작은 군이었다. 비록 루마니아 군이 제11 군의 수적 열세를 만회했지만 루마니아군은 독일군과 비교했을 때 훈련 뿐만 아니라 장비도 열악해 전력에 그다지 보탬이 되지 못했다. 폭우와 지형의 험난함은 만슈타인군의 전개를 약 1달 동안 연기시켰고 이 기간동안 흑해 함대 사령관 F. S. Oktyabrsky중장 Vice-Admiral은 휘하의 지상군 사령관인 페트로프에게 병력과 장비를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흑해 함대 소속의 순양함과 구축함

들도 노보로시스크Novorossisk로부터 지원을 위해 출발하였다. 

만슈타인은 12월 17일 해안을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병력을 상륙시킴으로서 만슈타인군의 진군을 저지시키려는 Oktyabrsky 의 생각보다 한발 앞서 공격을 재개하였다. 공격시작 후 5일 동안 독일군은 소련군의 제1, 제2방어선을 돌파하였고 다시 4일 후 제3방어선을 유린하기 시작하여 요새점령은 거의 기정사실화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2월 26일 소련군은 케르치Kerch 부근에 해안 상륙 거점을 구축하였고 2일 후 주력부대가 케르치Kerch반도를 고립시키기 위해 페오도시야Feodosiya에 상륙하였다. 이때 케르치에서 얄타Yalta에 걸친 275km의 해안선에 만슈타인은 오직 독일과 루마니아군 2개 사단만을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만슈타인은 곧 세바스토폴 공략을 멈추고 소련군 돌파구를 봉쇄하기 위해 전선에서 2개 사단을 차출하였다. 42년 1월 소련군 사령부는 코즐로프D. T. Kozlov소장이 지휘하는 크림 집단군Crimea front을 전시 편제로 복귀시켜 3개 군을 케르치 반도에 배치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 병력은 케르치 해협의 동결로 인해 트럭으로 수송되었다.) 42년 5월 기상조건이 호전되었을 때 만슈타인은 새로운 적인 크림 집단군과 대적해야만 하였다. 그는 1개 장갑사단(전차 180대로 구성)과 함께 독일군 5개 사단, 루마니아 보병사단 2개를 코즐로프가 지휘하는 21개 보병사단과 4개의 전차여단(총 350대) 전면에 전개시켰다. 5월 8일 공군의 엄호하에 하천 도하용 장비로 실행된 독일군의 상륙은 코즐로프군을 혼란시켰고 10일 후 작전은 종료되었다. 

스탈린이 소련군의 후퇴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약 17만여명의 소련군이 독일군의 포로로 수감되었다. 

크림 집단군 격퇴후 다시 세바스토폴 함락에 눈길을 돌린 만슈타인은 3개 내지 4개 사단이면 요새를 포위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르코프와 케르치에서의 승리로 고무된 히틀러는 또 다른 작전을 입안하였다. 즉 히틀러는 세바스토폴 함락 작전에 프랑스의 마지노 선Maginot Line파괴를 위해 고안된 초대구경 화포를 이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4-5월에 걸쳐서 설치된 33문의 포들은 구경이 280mm부터 600mm에 이르렀고 도라Dora라고 알려진 가장 큰 포는 무려 직경 800mm의 포탄을 50km나 발사할 수 있었다. 공격은 지형의 제한으로 인해 북쪽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남동쪽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페트로프는 106,000여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중 8만명 이상이 요새와 요새방어용 해안포대를 책임지고 있는 해군병력었다. 6월 2일 만슈타인은 초대구경 화포를 포함하는 600문의 대포로 세바스토폴 공격을 재개하였다. 아울러 6월 7일 4개 사단이 북쪽에서부터 공격에 참가했지만 소련군의 취약점을 포착하는데는 실패하였고 남동쪽에서 4일 후 전개된 3개 사단이 동원된 작전도 마찬가지였다. 포병화력은 요새공격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자연적으로 생성되었거나 인공적으로 만든 동굴에 장치된 자동화기와 소구경화포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주후 북쪽에서부터 공격에 참가한 독일군 부대는 세바스토폴 반대편에 있는 세베르나야Severnaya만까지 진출하였지만 남동쪽 에서 이루어진 공격은 Sapun고지에서 정체되었다. 히틀러는 6월 23일을 세바스토폴 함락의 최종기간으로 못박았지만 승리는 눈 앞에 보이지 않았고 공격의 중지는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요새함락의 실마리는 6월 28일 보트에 의한 세베르나야만을 가로질러 이루어진 공격에 시작되었다. 6월 30일 야음을 틈타 Oktyabrsky는 수백명의 고위장교와 함께 비행기로 세바스토폴 요새를 탈출하였다. 지휘부의 탈출로 요새의 저항은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7월 4일 전투는 9만명의 소련군 포로를 남긴채 종결되었다.

그러나 44년 봄 상황은 역전되었다. 44년 4월 중순 후미에 3개의 소련군이 압박해 오고 전투능력이 현저히 약화된 독일 제17군은 세바스토폴로 후퇴하였다. 17군 사령관 Erwin Jaenecke중장은 세바스토폴로부터 철수를 예상하였지만 히틀러는 소련군의 흑해 장악을 막기 위해 철군를 금지하였다. 요새함락을 우선과제로 설정한 소련군은 5월 5일 치열한 전투를 통해 Sapun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5월 6일 히틀러는 마지못해 철수를 승인하였고 콘스탄차Constanta로부터 출발한 선박편으로 3만 8천여명의 독일군은 세바스토폴로부터 완전 철수하였다.


출처:my.netian.com/~meyer



2002년 01월08일 메일박스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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