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 FT-17 전차에 대한 이야기 …
페이지 정보
본문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만 왔다갔다 하면 금방 싫증이 나니까
한번 동아시아의 세계로 날아가 볼까 합니다.
당시 중국 대륙에는 1925년까지 합산하여
1,000명이 넘는 러시아 군사고문관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베리아 내전을 경험한 베테랑이 대부분인 그들의 주요한 관심은
전차보다는 오히려 <장갑열차>에 쏠려 있었습니다.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다툼이었던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에 대한 영국의 불편한 심기가 자리잡고 있었듯이,
저의 생각으로는 동북 아시아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얽혀 있는 문제가
바로 <철도>였기 때문이라고 어설프게 추측해 봅니다.
중국 대륙에서 르노 FT-17 전차를 가장 먼저 입수하여 전투에 사용한 세력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이 아니라고 합니다.
1919년 블라디보스톡에 하역하였던 르노 전차의 일부가
당시 만주를 주름잡던 군벌 장작림의 손아귀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장작림은 이후 1924-25년에 걸쳐 14대 이상의 르노 FT-17을 더 구입하는데
이들은 그의 라이벌 <오패부>와 격전을 치루는데 사용됩니다.
오패부는 일본이 후원하는 장작림과는 달리
호북성을 기반으로 영국과 미국세력의 지원을 받던 북양군벌의 우두머리로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최대의 공포를 안겨 주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뒤질세라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 역시 1930년까지 여러가지 루트를 통해
총 36대의 르노 전차를 국내에 반입하는데, 그 중 첫번째로 수입한 10대의 물량은
<농업용 트랙터>라는 뻔한(?) 간판을 달고서 국내에 들여왔다고 합니다.
아뭏든 1928년 6월 7일 장작림 폭살사건이 일어나고
그의 아들 장학량이 장개석에게 투항하면서
만주 군벌들이 보유하고 있던 르노 전차들도 고스란히
국민당 군대의 제1기병여단의 일부로 새로이 편입됩니다.
그리고 이때쯤 불어닥친 장개석의 군 내부 공산주의자 숙청운동과 아울러
소련의 군사고문관들도 중국을 하나둘씩 떠나게 됩니다.
장갑열차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고 그 빈 자리를 독일인 고문관들이 채웠습니다.
1935년 1호전차 10대와 SdKfz 221형 장갑차,
그리고 사진모형과 같은 222형 장갑차가 중국대륙에 들어옵니다.
이같은 현상은 중일전쟁 발발로 소련의 지원이 다시 시작되는 1937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929년 가을에 일어난 중국과 소련의 무력충돌 이야기를 잠시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 사건의 발단에 대해서 떠듬떠듬 설명하는 것보다는
레온 트로츠키가 그해 8월 4일에 쓴 글 일부를 옮기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뭐 어차피 자신들의 입장만 피력한 글이니까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장개석의 군대가 25-27년에 걸쳐 중국 대륙에 산재한 군벌들을 상대로
놀라울 정도의 승리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순수한 군사적인 관점에서 장개석의 군대는 너무나 취약하다.
장개석이 외세의 도움 없이 우리의 소비에트 적군을 막아낼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중국 내의 혁명이 실패하더라도 소련은 장개석과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개석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정확히 말한다면 장개석의 군대는 다른 열강들의 무력을 보조하는데 그칠 뿐이다.
나는 현재 시점으로는 이러한 그들의 야합이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지 않는다.>
--------------------------------------------------------------------
전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고 시일이 짧았기 때문에
충돌(Sino-Soviet conflict)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낫겠지만,
중소분쟁은 원래 청나라 강희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해묵은 영토문제인데다가
당시에는 동아시아에서의 이념간의 대립이라는 색채도 함께 띄고 있었습니다.
2001년 11월07일 메일박스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totalmilitary.ne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