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르지방 댐폭격작전
페이지 정보
본문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개발했던 많은 신병기들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독일군이 이것저것 많이도 개발한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자료의 영향도 있겠지만...)
이러한 독일군들의 병기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상당히 기발한 병기들이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잘 알려지진 않았어도 연합군측 역시 상당히 기발한 병기들을 여럿 개발했습니다. 대부분 독일군의 기발한 병기들과 마찬가지로 시험과정에서 실용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 때문에 이름 없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몇몇 성공작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 소개할 '도약폭탄'입니다.
(이 자료는 '승리와 패배'제5권에 나온 내용을 정리한것입니다.)
--------------------------------------------------------------------------------
[루르 지역 댐 폭격작전]
1. 번즈 웰리스
독일의 주요 공업지대인 루르지방의 제철소들은 독일의 전쟁능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곳이었다. 그리고 이 제철소에 전력을 공급하는 전원은 이 지역의 수력발전소들이었다. 따라서 이 수력발전소들이 위치한 댐들을 파괴하는 것은 독일의 전쟁수행능력을 밑바닥부터 흔들어놓게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게다가 이 댐들이 파괴되면 루르지방의 전력공급뿐 아니라 공업용수의 공급까지 끊어지게되어 사실상 독일의 제철능력은 상당기간 크게 떨어지게 될것이 명백했다.
문제는 댐을 어떻게 파괴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폭격의 경우 댐에 정확하게 폭탄을 명중시켜야 효과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폭탄의 양은 대략 30톤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독일군은 댐을 방어하고자 댐정면 계곡에 치밀하게 대공포를 배치해두고 있었다. 정확한 폭격을 위해서 이 계곡으로 뛰어들었다가는 폭격을 해보기도 전에 대부분 격추될 판이었다.
어쩌다 한두발도 아니고 30톤의 폭탄을 투하하기 위해 폭격기를 투입한다면 막대한 희생이 따를 것은 명백했다.
그러면 반대쪽인 호수쪽으로 공격하면 어떨까? 물은 대기와 달리 충격파에도 잘압축되지 않으니 폭약의 파괴력은 그만큼 증대되어 필요한 폭약의 양도 줄어든다. 이 경우 5톤정도면 충분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문제는 이정도의 폭약을 어떻게 댐 벽면에서 폭팔시킬까였다.
어뢰가 가장먼저 떠올랐다. 여러발의 어뢰의 탄두라면 이정도 폭약량이 되어 효과를 충분히 기대할수 있었다. 그러나 조사결과 독일측 역시 이런 가능성에 대비해서 호수에 방뢰망(어뢰방어용 그물을 이중으로 설치했음.)을 설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서 '번즈 웰리스'라는 한 발명가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전쟁전에 빅커스비행기공장에 근무하면서 1920년대에 영국의 비행선중 최대성공작인 R-100을 설계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10년후에는 비행기제작 자재의 경량화를 크게 진보시킨 '최단선 구조원리'를 고안해내기도 했다.
(최단선 구조원리- 비행기 동체등의 구조자재를 서로 최단거리에서 결합시켜 강도를 늘리면서 중량을 경감시키는 방식. 웰링톤 폭격기제작에 처음 채용됨.)
그는 당시 폭탄이 지표에서 폭팔해 대부분의 파괴력이 대기가 압축되면서 흡수, 낭비되고 있다면서 이를 개선한 폭탄의 개발을 구상했으나 무시당하고 있었다.
(일명 지진폭탄인 그의 아이디어는 그 뒤 여기서 설명할 '도약폭탄'의 성공에 따라 인정을 받아 '토올 보이'와 '그랜드 슬램'이란 이름으로 개발됩니다. 이 두 폭탄에 관해서는 후에 따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그의 착상은 정말 기발한 것이었다. 아이들의 물수제비놀이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는데 여러 테스트결과 대형의 원통에 회전을 걸어 떨어뜨리면 그와 비슷한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것이겠지만 이 아이디어는 가능성에 의문을 품은 일부의 반대에 부딪쳤다. 항공기에 의한 투하실험(CTN방영다큐 '영상실록 포화속의 100년'의 오프닝의 장면이 이 실험장면입니다.)결과에서도 예상대로 가능성이 확인되었지만 정부당국은 여전히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 아이디어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1943년경 누가 주장했는지 느닷없이 루르지방의 댐폭격작전이 결정되었다.
그와 동시에 '도약폭탄'역시 갑자기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다.
상당한 정밀도가 요구되는 폭격조작을 확실히 하기위해 여러 가지 보조장비가 고안되었다.
먼저, 정확한 고도유지를 위해 폭격기의 기수와 후부에 한 개씩 스포트라이트를 달았다. 이 라이트에서 나온 빛의 동그라미가 지상에서 '8'자모양이 될 때 정확한 고도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호수 상류쪽에서 댐쪽으로 접근하는 폭격기가 투하지점을 정확히 알수 있도록'Y'자 모양의 표지가 조종석의 유리에 부착되었다.
'Y'의 밑쪽에서 댐을 봤을 때 위 두 끝이 댐의 양끝과 일치하는 순간이 적합한 투하지점이 되는 것이었다.
2.폭격 작전
1943년 5월 16일 오후 9시 30분. 이 작전을 위해 특별히 편성된 제617비행대의 랭카스터 폭격기들이 이륙했다. 이 폭격기들은 기체가 개조되어 직경 1.5m의 원통형 폭탄과 투하직전 모터와 연결된 밸트로 폭탄에 회전력을 주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편대는 첫 목표인 '메네'댐에 무사히 도착했다. 1번기가 맨먼저 돌입하여 폭탄을 투하했다. 폭탄은 수면을 껑충껑충 점프하면서 돌진하여 맹렬한 속도로 댐벽면에 충돌한후 예정대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다음 수압신관에 의해 대폭팔이 일어났다.
그러나 댐은 이 폭팔을 견디어냈다.
뒤이어 폭격을 시도하던 2번기는 대공포화에 투하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폭탄은 댐을 지나쳐 댐 밑의 수력발전소건물에 명중해 대폭팔을 일으켰다.
2번기 역시 불덩이가 된채 지상에 격돌했다.
3번기는 투하지점을 정확히 잡아 도약폭탄을 투하했다. 물기둥이 330m나 치솟았으나 여전히 댐은 끄떡하지 않았다. 4번기역시 정확히 투하했지만 댐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게다가 연이은 폭팔로 솟아오른 물기둥으로 인해 시야가 나빠져 투하조건까지 나빠졌다.
그러나 이 악조건을 뚫고 5번기가 정확하게 도약폭탄을 투하했다. 그리고 수초후.....
댐벽면이 조금씩 흔들리면서 금이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벽면이 벌어지면서 물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댐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광경은 정말 웅장한 것이었다. 메네댐은 마침내 붕괴되었다.
두번째 목표는 '에델'댐이었다.
에델댐에 선두로 돌입한 1번기는 폭탄을 투하하자마자 댐 상공에서 박살나고 말았다. 조준을 잘못해 폭탄이 댐난간에 부딪쳐 폭팔하면서 초저공으로 빠져나가던 1번기가 폭팔에 휘말려든 때문이었다.
그러나 뒤어어 돌입한 2번기부터 정확히 폭탄을 투하해 에델댐은 간단히 붕괴되고 말았다.
이어서 세 번째로 '조르페'댐이 붕괴됐고 마지막 '엔네페'댐도 무너졌다.
아이디어 단계부터 이 폭탄에 관한 웰리스의 설명은 완벽한 것이었다. 물론 거대한 원통이 빙빙돌면서 수면을 툭툭튀어가는 장면은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이론적으로 가능성 증명되었고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관계당국은 이 계획에 그리 마음내켜하지 않았었다.
이론적으로나 실험적으로 증명이 되었으면서도 인간의 타고난 보수성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한 계획은 무수히 많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결실을 맺기까지는 운이 좋아야 하고 기회를 잘 잡아야 하며 아이디어를 살리기 위한 세일즈맨의 정신이 필요하다.
번즈 웰리스의 '도약폭탄'은 그런 좋은 예가 될 것이다.
--------------------------------------------------------------------------------
루르지방의 댐 폭격작전은 아는 분들은 다 아시는 꽤 유명한 작전이지만 의외로 이 도약폭탄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편이 아닙니다. 그저 '수면을 튀어가는 특수폭탄을 썼다더라'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CTN의 '영상실록 포화속의 100년'의 오프닝에 이 폭탄을 테스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 보신분도 있을것입니다. 꼭 무슨 드럼통을 떨어뜨리는 것 같죠.
책에 실린 도면을 보면 폭탄은 전진방향의 반대로 회전을 합니다. 역회전에 의해 수면을 쳐올리면서 튕겨오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진방향으로 회전시키면 물에 가라 앉아버린다고 합니다.
참고로 영국은 독일측이 이 댐을 복구하는데 적어도 1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측은 밤낮없는 복구작업 끝에 3개월만에 복구작업을 끝내버립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철강생산의 대폭 감소는 어쩔 수 없었고 안그래도 부족한 철강공급은 더 부족해져서 병기생산에 상당한 차질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
2001년 11월07일 메일박스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s://totalmilitary.ne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