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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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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사 사진 및 영상자료 추가가 지속됩니다.

회화/사진으로 보는 대조국전쟁(독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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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만이 아니라 소련 각지의 소수민족 출신 젊은이들도 동원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소련의 민족 문제는 너무도 복잡해서 진격해 들어오는 독일군을 해방자로 보고 환영하는 소수민족들도 있었지만, 전쟁이 진행될수록 소련 지도부의 호소에 응해서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이 전장으로 나아갔다.



 

(6) 그림설명: 무샤일로프(M. Mushailov), "어머니들의 검은 숄."

그림 가운데 있는 여인이 전사자 명단을 읽어내려가자, 다른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이 하나둘씩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전선으로 간 아들, 형, 아저씨의 죽음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다게스탄(Dagestan)인이 그린 이 그림은 이처럼 독소전쟁은 러시아인만의 전쟁이 아니라 소련 내 모든 민족의 전쟁이었으며, 전쟁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슬픔이 소련 전역에 내려앉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보노라면, 글쓴이가 깊은 생각없이 독소전을 "독일에 맞선 러시아인의 전쟁"이라고 표현했을 때, 곧바로 "독일에 맞선 소련인민의 전쟁"이라고 지적해주던 고려인 아저씨가 생각난다.





(7) 그림설명: 라리체프(M. Larichev), ""봉쇄기의 빵".

혁명의 요람 레닌그라드(Leningrad, 현재의 성 페테르부르그[St. Peterburg])는 개전 몇 달 만에 독일 북부집단군에게 포위되었다. 독일군은 도시를 봉쇄한 채 레닌그라드가 스스로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이로써 끔찍한 레닌그라드 봉쇄가 시작되었고 1944년까지 900여일간 지속되었다. 4백만 레닌그라드 시민은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어찌 보면 독일군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굶주림이었다. 식량 배급량은 갈수록 줄어들어 첫해 겨울에 시민들은 150그램이 채 안 되는 빵으로 하루를 버텨야만 했다. 그림에서 포탄피로 만든 등불이 3등분된 하루치 배급분 빵을 비추고 있다.






(8) 사진설명: 레닌그라드 봉쇄 기간 어느 해 겨울 하루치 배급을 손에 쥔 레닌그라드 시민의 모습.

이런 빵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다가 결국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죽어간 레닌그라드 시민의 수가 첫해 겨울에만 수십만 명에 달했다. 이 빵을 먹고 시민들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참호도 파야만 했다. 이런 고통을 감내한 끝에 레닌그라드는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만약 레닌그라드 시민이 독일군의 봉쇄에 무릎을 꿇었다면, 소련은 혁명의 요람 레닌그라드를 상실했다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머지 독소전쟁에서 패배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발휘한 불굴의 의지가 소련의 궁극적인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역사칼럼란에 글쓴이가 올린 "타냐만 남았다...: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봉쇄와 한 소녀의 비극"이라는 글을 읽으면, 레닌그라드 시민이 봉쇄 기간 중에 겪은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9) 그림설명: 세레브랴늬이(I. A. Serebrianyi), "1942년의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아".

레닌그라드 음악가들도 적과 싸웠다. 총이 아니라 음악으로! 레닌그라드 교향악단은 무료로 공연을 했으며,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봉쇄로 말미암은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연주회장을 찾아가 음악을 들었다. 총을 멘 채로 연주회장을 찾는 병사의 모습과 아름다운 선율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시민의 모습에 주목을 하라!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가 바로 이 무렵에 만든 작품이 바로 교향곡 "레닌그라드"였다.





(10) 사진설명: 1942년 1월 흑해 케르치(Kerch') 반도에서 독일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독소전쟁은 한 민족이 다른 한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적지 않은 독일인들이 슬라브인을 하등인종(Untermensch)으로 보고 절멸의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지배인종 아리아인이 소련 땅에 정착할 때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살려두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이런 인종관은 독일군의 소련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





(11) 그림설명: 쉬마리노프(D. A. Shmarinov), 어머니. ("잊지 말자, 용서하지 말자!" 시리즈 중에서)

수채화로 그려진 이 그림에서 독일 점령군 손에 죽음을 당한 아들의 주검 앞에서 어머니가 넋을 잃고 있다. 독일군에게 점령된 지역 도처에서 사진에서 나오는 바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잔인한 학살이 자행되었다.(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소련영화 "와서 보아라!"에서 독일군의 소련 민간인 학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2) 그림설명: 사비츠키(M. Savitskii), "파르티잔의 전투".

독일군의 잔학행위가 계속되자, 독일군 점령지에서 소련시민들의 파르티잔이 조직되어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이 작품은 밀밭에 매복해 있다가 지나가던 독일군 부대를 습격하는 파르티잔 대원들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이같은 파르티잔의 투쟁은 독일군의 배후를 교란함으로써 적군의 전투력에 적지 않은 손상을 안겨다 주었다. (소련영화 "와서 보아라!"에는 독일군에게 마을사람들이 몰살당하는 광경을 목도한 소년이 파르티잔에 가담하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





(13) 그림설명: 우가로프(B. Ugarov), "1942년 가을 스탈린그라드의 아수라장".

1942년 늦여름부터 이듬해 늦겨울까지 볼가강에 있는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현재의 볼고그라드[Volgograd])란 이름의 도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뒤바꾸는 전투가 벌어졌다. 도시를 포위해서 시중심부로 옥죄어 들어오는 파울루스(Faulus) 장군의 독일 제6군에 맞서서 희대의 싸움꾼 츄이코프(Chuikov) 장군이 결사적인 방어전을 지휘하면서 격렬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양상은 시가전이 아니었다. 거리 하나가 아니라 건물 하나, 심지어는 집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양측 병사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소총보다는 야전삽이 더 쓸모있는 살상무기로 쓰이는 육탄전이 다반사인 전투였던 것이다. 이런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처절한 모습은 우가로프의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14) 사진설명: 치열한 시가전의 한 장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형적인 한 장면을 잡은 이 사진은 우가로프의 그림에 과장이 거의 섞여있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벽돌더미로 뒤덮인 부서진 건물에서 싸우는 붉은 군대 병사들의 모습, 특히 적의 저격에 희생되어 널부러진 병사의 모습에 주목을 하라! 이런 전투 속에서 붉은 군대 병사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을 치르고서 소련은 귀중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런 시가전이 연일 계속되던 와중에 소련군이 자랑하는 불패의 영웅 쥬코프(Zhukov) 장군이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독일군을 역포위하는 작전을 감행하여 일시에 전황을 뒤바꾸면서 불패를 자랑하던 독일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다. 나중에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를 지키겠다는 스탈린과 도시를 점령해서 히틀러부르크로 명명하겠다는 히틀러, 두 독재자의 자존심 싸움이 되기까지 한 이 역사적인 전투는 결국 스탈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처음으로 커다란 패배를 맛본 독일은 충격에 휩싸였고, '독일군은 패하지 않는다'는 신화를 깨뜨린 소련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이후로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다시는 주도권을 되찾지 못했다. 아무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제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15) 그림설명: 소이페르티스(L. Soifertis), "이럴 틈이 없는데!"("세바스토폴 방어전" 시리즈 중에서)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소련 시민들은 놀라울 정도의 결속감을 발휘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분위기가 사회 전체에 형성되었다. 소이페르티스는 최전선으로 막 떠나려는 소련 해군 육전대 병사의 군화를 닦아주는 두 어린이를 그리고 있다. 곧바로 전투를 치를 병사에게 윤이 나는 군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난감해 하는 병사의 속마음에는 아랑곳해 하지 않고 헝겊으로 군화를 문질러 광택을 내는 데 열중하는 두 어린이의 가슴에는 자기들도 전쟁 승리에 한 몫을 하고 있다는 희열감이 가득차 있을 것이다.


출처: 역사기행 http://www.ilovehistory.net/



2002년 01월09일 2차대전사 운영자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s://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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