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 항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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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6월 10일 오후 6시 전쟁중인 로마의 Palazzo Venezia에서 무솔리니는 연설을 하였다.
독일이 몇주내에 프랑스의 저항을 일소시켰고 파시즘의 지도자는 협상테이블에서 승리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탈리아군이 물적이나 정신적으로나 독일군처럼 싸울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주요한 목적은 독일이 승리했을 때 그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파시즘을 지지했고 로마제국의 부활을 위하여 몰타를 제국의 일부로 만들려는 요구가 생겼다. 그리고 육군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몰타문제는 Regia Aeronautica(이탈리아 공군)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했다. 그리고 6월 10일 지도자는SuperAereo(공군사령관)에게 다음 날 군사시설을 목표로 하여 폭격하도록 명령했다.
말타를 접수하기 위해선 보병으로 직접 섬을 공격하고 그것을 점령하는 방법이 유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계획- Operation C.3 -이 세워지고 부분적으로 수행될거라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었다. 마침내 그런 전략이 초기부터 강경하게 추진된다면 아마도 그섬이 별문제 없이 추축국의 손에 떨어지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면 그섬은 개전 몇
달만에 방어력이 약해질테니까.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계획도 30년대에 이탈리아가 강력한 공군을 건설했는냐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공군은 형편없었고 시대에 뒤처져 있었다.
Giuseppe Santoro장군에 의해 쓰여진 "L' Aeronautica italiana nella seconda guerra mondiale" 의 첫 번째 책(2차대전중 이탈리아의 항공)중 20페이지에서 우리는 이탈리아의 상황에 대한 인용을 몇가지 읽을 수 있었다.
다른 국가들이 폭격용으로 쌍발기 내지는 4발기를 사용했는데 비해 우리는 폭격용으로 3발기를 고집했다. 무기와 폭격장비는 형편없었고 조작하기 어려웠다. 또한 다른국가의 전투기들이 실린더가 일렬로 배열된 엔진을 장비한데 반해 실린더가 별모양으로 배열된-속도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이 분명한-엔진을 계속 장착하였다. 그것은 비행기의 역할을 감소시켰다. 일정 기간동안은 구형 항공기의 생산량을 늘렸고 그로 인해 임무에 필요한 신형항공기를 위한 생산라인으로 변경할 기회를 빼앗았다. 반면 다른 나라들은 장갑도 관통하는 큰 규격의 폭탄을 만들었던데 반해
우린 500kg(Italians mounting bomb on a SM-79)폭탄을 생산하는 것에 그쳤다. 적은 수의 폭격기가 통신장비를 갖추었고 전투기들은 단 한 대도 무전기와 야간과 악천후, 고고도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질 못했다.
독일을 제외하곤 그 어떤 국가도 전쟁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중인 다른 국가들이 긴 시간동안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필요한 요소를 갖고 있었던 데 반해 우리의 산업능력은 조악한 상황속에서 양적 질적으로 모든 것이 약화되고 있었다. Regia Aeronautica가 6월 11일 아침에 전투에 폭격기 35대가 2개의 비행중대로 나뉘어 시실리에서 출격하여 CR-42 팔코복엽전투기 18대에게 호위를 받으며 무솔리니의 명령을 수행하였고 라발레타의 해군시설과 할파의 비행장을 폭격하였다.
그러나 이 첫 번째 공격이 어떤 거주지 중심을 벗어났다면 며칠도 안 되서 무솔리니가 그 섬이 지중해에서 영국군의 작전기지로 이 섬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 섬이 초토화되도록 중폭격을 결정하였을 때 이 공격은 중지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6월 26일 폭격기 26대가 할파와 루카 비행장과 라 발레타에 있는 군수품창고를 타격하였다. 그리고 12월 중순전까지 폭격이 연장되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섬에 약한 화력으로 공습을 퍼부었다하더라도 그 섬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몰타는 강력한 대공화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섬의 비행장은 3개로 한정되어 있었고 공군력은 5대의 소드피쉬 복엽기와 4대의 글로스터 글라디에이터 복엽전투기와 한 대의 훈련용으로 쓰이는 디하빌랜드 퀸 비가 전부였다.
증원군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초반이었고 많은 위험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이 증원군의 규모는 작았다. 8월 2일 지중해의 아거스항모로부터 12대의 허리케인이 출격하였다. 이 항공기들은 섬에 도착하였고 261비행중대에 배속되어 몰타의 방어를 맡게 되었다. 다른 증원군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섬에 도착했고 12월 말까지 몰타엔 51대의 잡다한 항공기가 주둔하게 되었다. 그래서 작전이 시작된 5달이 지난 12월 말에 이탈리아공군은 한편으로는 리비아수송로와 시실리의 비행장에 대항하는 몰타의 공격력을 봉쇄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몰타의 방어력을 손대지 않고 놔두었다. 그래서 결국 방어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탈리아군의 부조화는 물적이나 인적인 다른요소에 기인한다. 첫째 이탈리아의 현대적전투기의 부족은 허리케인이 강력한 공군력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전술했듯이 이탈리아폭탄은 섬의 동굴 요새에 타격을 입히기에는 위력이 너무 약했다. 두 번째론 이탈리아군과 파일럿은 충분히 훈련받지 못했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초기엔 이탈리아의 폭격은 효과가 경미하였다.
그래서 1940년내내 전황은 폭격초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와 전쟁을 하게 된 이탈리아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 전쟁은 두 개중대의 공군력을 그들이 필요로하는 때와 장소에서 소모시켜 버렸고 파일럿과 병사들은 단 한번 몰타와 효과적으로 싸울 풍부한 경험을 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일이 공군의 요구에 의해 크게 강요 받지 않았지만 이탈리아에게 X Fliegerkorps의 깃발아래 비행기의 지원을 제안한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Regia Aeronautica의 지휘관과 Oberst Milch장군사이에 몇가지 회의가 있은 후 이 제안은 기쁘게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X Fliegerkorps부대가 12월 중반부터 시실리비행장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한달 뒤 주력기가 교체되었고 3월까지
오직 몇몇부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도착한 헨켈과 메서슈밋, 융커스기가 지중해전황에 있어서 몰타전투의 두 번째의 강렬한 국면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1941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의 주둔은 즉시 1941년 1월 11일에 폭격을 실시할 것을 입증하였다. 그날로부터 주민들과 영국군들에게 가장 어려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독일이 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수송선단이 길버타로부터 항해해서 몰타근처까지 접근하였다. 이 선단은 항모 일러스트리어스에 의해 호위받고 있었고 루파페의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
1월 10일 연속된 공격과 함께 수투카 60대가 수송선단을 공격했고 여섯 번이나 항모를 공격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806비행중대의 Fulmar전투기가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1월 12일 이탈리아정찰기가 항모가 라빌레타 항구에서 수리를 받는 것을 포착했다. 그리고 X Fliegerkorps 의 16대의 항공기가 이 지역을 공격했다. 어쨌든 일러스트리어스는 단 한번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주요한 피해는 도시와 항구에 집중되었다. 수백명의 주둔군에게도. 1,2,3월 내내 루파페는 섬에 대한 맹폭격을 가했고 주요표적은 루카와 할파, 타칼리에 있는 비행장과 항구였다. 영국의 반격은 항상 영웅적이었지만 공격은 거의 시도되지 않았고 R.A.F 는 웰링턴 쌍발기를 보내어 시실리 비행장에 폭격을 시도했지만 피해가 경미했다.
3월 말에 발칸지역이 점령된 뒤 X Fliegerkorps는 활동무대를 그리스로 옮기기 시작했다. 몇 달도 안되어 독일부대는 이탈리아가 수행할 수 없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시실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몰타가 완전히 초토화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일소시켜야 했다. 결국 그 방어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고 많은 수의 독일전투기들이 이동함에 따라 공격이 중지됨에 크게 힘입었다.
다른시각에서 이탈리아의 상황을 보면 이렇게 정리된다. 독일주둔기간동안 이탈리아가 루파페의 폭격기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CR-42 "Falco"와 Macchi MC-200을 보냈다면 지금쯤 그들은 그들의 조악한 힘으로 폭격을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1941년 11월 3월로부터 그 기간을 영국군은 잘 이용했다. 몰타에 가능한 많은 수의 전투기를 배치한 것 뿐 아니라 새로운 비행장을 건설했다. 또한 격납고와 레이더기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레이더는 적은 자원으로 효과적으로 위협에 대처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그 해 말에 몰타의 상황은 완전히 빗나갔다. 지금 완전히 증원되었고 재충전된 그섬
은 이탈리아와 리비아를 통하는 수송선단을 북아프리카에서의 군사적작전이 대단히 그것에 영향을 받았던 그런 방식으로 공격할 수 있다.
이 중대한 위협하에서 OKW는 루파페를 이탈리아에 II Fliegerkorps로서 Kesserling사령관의 지휘하에 다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이것은 제안이 아니라 이탈리아에 대한 명백한 명령이었다. 사실 루파페는 자신들의 제안을 통해서 최고의 시실리 비행장을 "요구"하고 "획득"하였다. 그리고 그 비행장에서 Regia Aeronautica을 철수시켰다. 그래서 12월 말에는 250대의 폭격기와 200대의 전투기가 몰타의 70대의 폭격기과 60대의 전투기와 대립하였다.
그래서 1941년 말, 새해초에 몰타역사중 가장 끔직한 기간이 시작되었다. 이 몰타전투막바지에 죠지 크로스 훈장을 얻게 한 매우 맹렬한 전투가 행해졌다. 1월에 증원병력을 실은 5척의 배가 그랜드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1월 중반에 3척의 운송선과 그들의 호위함으로 이루어진 수송선단이 지중해에서 크레타와 Cirenaica사이의 지역에서 공격을 받았다. 영국인들은
그사건을 '폭탄골목'이라고 불렀다. 2척의 배가 침몰했고 나머지 한척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선단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해전은 Second Sirte naval battle 로 알려졌다. 전투동안 2척의 운송선이 가라앉았고 오직 두척-탈봇과 팜파스만이 몰타에 도착했다. 그 달말에 케셀링은 La Valletta에게 도망친 나머지 두척의 배를 끝장내버리기 위해 326대의 항공기-전투기, 폭격기를 보내었다. 그 때 Feldmarschall는 괴링에게 지도에서 몰타를 지워버리겠다고 확실히 약속을 하였다. 사실 그
달 내내 루파페는 4927번 출격을 하였고 4월에 9599번으로 늘었고 67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모든 심각한 공격은 몇대의 전투기에 의해서 저항을 당했고 모든시기동안 그 섬은 그럭저럭 버텨나갔다. 그러나 끊임없는 압박속에서 항구가 포기될때까지 몰타는 해군기지로서의 능력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보급문제는 커져만갔다. 그리고 주민들은 아사할 위기에 처했고 복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몰타의 운명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였을 때 몰타의 R.A.F 사령관 P.Lloyd 가 그 피해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선언했고 상황은 호전되었다.
끊임없는 공격이 있었던 6주가 지난 뒤 케설링은 몰타의 방어력은 이미 사라져버렸다고 확신했고 또한 주기적인 공격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II Fliegerkorps에게 공습을 점차적으로 줄여나가고 러시아에 파견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만약 그 공격이 계속될 필요가 있었다
면 이탈리아공군이 그 임무를 수행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손실이 가혹할정도로 계속되었지만 몰타의 증원군은 받아들여질수 있는 수준까지 달하기 시작했다. 4월 20일 46대의 스핏파이어가 섬에 항모 와스프부터 출격했다, 바로 그 때 그 섬에 착륙하는 순간 그들은 수투카들에게 공격당했다. 그리고 3일 뒤 그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5월 9일 60대의 항모 와스프와 이글로부터 출격한 스핏파이어가 그 섬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재빨리 착륙해서 연료를 공급받고 주축국의 위협과 싸우기 위해 공수부대로 돌아갔다. 그 날이후 첫 번째로 루파페의 항공기들은 RAF 전투기들의 더 큰 위협에 직면했다.
그리고 그 달동안은 다른 증원군이 계속해서 도착했다. 스핏파이어는 전부 198대였고 연료는 잠수함과 배로 보급되었다.이러한 위협속에서 Regia Aeronautica는 the elder Cant Z 복엽폭격기와 새롭지만 비효율적인 SM84 3발 폭격기와 효율적이었지만 수가 적은 마키202폴고레전투기로 무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II Fliegerkorps 가 수행한 임무를 수행할 수 조차 없었다. 결국 점점 수가 많아지는 스핏파이어와 야간요격기 Beaufighter와 새로운 레이더장비의 등장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7월 중하순이 되었을 때 Superaereo는 이탈리아군에 명령하였고 독일군에게 리비아로 향하는 이탈리아 수송선단의 보호로 한정하는 경우 독일부대가 남아서 공격을 줄여줄 것을 명령했다.
8월과 9월 동안 그섬에 대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활동은 점점 줄어들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엘알라메인 전투가 다가오자 모든 항공기가 그 지역을 향해갔다. 점점 많은 병사들이 몰타에 대한 끊임없이 길기만 한 공격에 의해 사기가 떨어져갔다. 그래서 그들의 활동의 숙련도와 효율성이 저하되었다.
그래서 그 활동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끝나버렸다. 그리고 엘알라메인에서 Commonwhealt의 군대에게 타격을 받은 주축국의 군단도 몰타에 대한 공습을 중단했다. 몰타에 있어서는 고통과 죽음의 시간이 종말을 고했던 것으로 기억되었고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에 있어서는 파일럿과 병사들이 몰타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그들의 임무를 다했지만 종말이 다가온 것은 명백해졌다. 진짜책임은 무솔리니에게 있었다. 그는 적에게 맞서기엔 이탈리아의 군사력이 모자란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승리를 위해 수천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출처:defence.co.kr/김각중
2001년 12월22일 메일박스님이 작성하신 게시물입니다.
출처 : 토탈밀리터리 https://totalmilit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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